예술가 48명의 창작 기록 분석… 스케치-초고 통해 창의성 엿봐
기록하는 습관에서 영감 얻고, 수많은 실패 끝에 작품 탄생
노벨 문학상 받은 ‘루이즈 글릭’… 시 한 편 완성에 2년 걸리기도
◇예술이라는 일/애덤 모스 지음·이승연 옮김/440쪽·5만4000원·어크로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1943∼2023)은 어느 날 문득 한 문장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던 때였다. 하지만 이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얼마나 대단한 시가 될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는 곧 고통으로 바뀌었다.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았고, 수없이 머뭇거리고, 써보고, 다시 지웠다. 한 문장에서 출발해 시 ‘야생 붓꽃’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년. 그는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끝내 시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2020년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대표작으로 꼽혔다. 글릭은 고된 창작의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극심한 고통이 이어지죠. 금맥을 찾아낸 건 알았지만, 어떻게 거기 도달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어요. 글쓰기가 힘든 건, 정말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이 책은 미국 뉴욕타임스,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일한 저널리스트가 현대 예술가 48명을 만나 창작의 내밀한 과정을 탐구한 인터뷰집이다. 저자는 각 예술가에게 수차례에 걸쳐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냐”고 묻고, 그에 대한 진지한 답을 끌어냈다. 예술가들의 스케치와 낙서, 초고까지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창의성’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예술가들이 창작하기 위해 기록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냅킨, 식당 메뉴판, 노트앱 등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머릿속 단상을 붙잡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저자 자신도 일기를 쓰고, 문득 떠오른 생각은 냅킨에라도 적어두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 역시 그런 습관의 연장선에서 완성했다고 말한다.
책에 실린 구겨진 초안, 버려진 낙서, 지우고 다시 쓴 문장들을 들여다보다 보면 예술가를 둘러싼 ‘천재’의 환상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예술가도 결국 망설이고, 흔들리고, 실패를 견디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직장인이나 자영업자처럼 매일같이 고군분투하고, 그러면서도 끝내 결과물을 완성해 낸다. 그렇게 보면 예술도 결국 ‘일’이다. 거꾸로 어떤 일이든 그렇게까지 버티고 끝까지 해낸다면, 위대한 예술처럼 훌륭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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