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석의 PSG 팬들이 펼친 통천 속 그림도 비슷했다. 여기엔 엔리케 감독이 PSG 깃발을 경기장에 꽂는 걸 그의 딸 사나가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엔리케 감독이 FC바르셀로나(스페인·바르사)를 이끌고 2014~2015시즌 챔스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그와 함께 팀 깃발을 그라운드에 꽂았던 막내딸 사나의 모습을 오마주한 것이다.
PSG는 이날 독일 뮌헨에서 열린 2024~2025시즌 챔스리그 결승전에서 인터 밀란(이탈리아)을 5-0으로 꺾고 1970년 창단 후 55년 만에 유럽 정상에 섰다. 하지만 10년 전 엔리케 감독의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챔피언 세리머니를 함께 했던 사나는 이날 아빠 곁에 없었다. 2019년 뼈암 판정을 받아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고 마지막까지 딸의 곁을 지켰던 엔리케 감독은 지도자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다시 사나를 떠올렸다. “나는 늘 사나를 생각하고, 지금도 곁에 있다고 느낀다. (사나를 추모해 준) 팬들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다.”
PSG는 2011년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츠에 인수된 이후 ‘오일머니’를 앞세워 네이마르(33·브라질), 리오넬 메시(38·아르헨티나) 등 스타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적료 등으로 2조 원이 넘는 돈을 쓴 PSG는 프랑스 최상위리그 최다 우승팀(13회)으로 우뚝 섰지만, 유럽의 강팀들끼리 경쟁하는 챔스리그에선 ‘모래알’ 같은 조직력을 보이며 번번이 우승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돈으로 빅이어(챔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살 수는 없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PSG는 엔리케 감독의 지도력에 힘입어 숙원을 풀었다. 이번 시즌 PSG는 프랑스 리그1과 프랑스컵, 프랑스 슈퍼컵 우승을 합쳐 ‘쿼드러플’(4관왕)을 달성했다.
메시와 네이마르가 팀을 떠난 2023년에 PSG 지휘봉을 잡은 엔리케 감독은 팀 체질 개선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 BBC는 “PSG는 엔리케 감독 부임 이후 슈퍼스타 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났다. 엔리케 감독은 스타 선수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많은 활동량을 강조하는 엔리케 감독은 리그1 득점왕에 여섯 차례 오른 킬리안 음바페(27·프랑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가 미팅룸에 음바페를 앉혀놓고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미국)은 수비도 미친 듯이 했던 선수다. 네가 수비도 적극적인 리더가 되길 바란다”며 강하게 지시하는 영상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음바페는 지난해 7월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당시 엔리케 감독은 구단 수뇌부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더 젊고, 더 많이 뛰고, 더 응집력 있는 팀을 만들 겁니다.”이번 시즌 PSG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사령탑의 철학 아래 젊은 선수들이 헌신적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유럽 최강팀으로 거듭났다. 결승전에서 2골을 넣은 유망주 데지레 두에(20·프랑스)와 챔스리그에서 8골을 넣은 주포 우스만 뎀벨레(28·프랑스) 등은 공격에만 치중하지 않고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결승전 선발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25세로 인터 밀란(평균 30세)보다 다섯 살 어렸던 PSG는 강한 압박과 날카로운 역습으로 역대 챔스리그 결승전 최다 골 차 승리를 거뒀다.엔리케 감독은 바르사에서 챔스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다. 하지만 당시엔 메시와 네이마르 등을 보유한 바르사가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불릴 정도로 전력이 막강해 사령탑의 리더십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엔리케 감독은 PSG에서 다시 한번 3관왕 이상의 성적을 내면서 명장 반열에 올랐다. 엔리케 감독은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시티 감독(54·스페인)에 이어 유럽 축구 역대 두 번째로 서로 다른 두 팀에서 3관왕을 이룬 감독이 됐다.
PSG 이강인은 결승전에 결장했지만 2007~2008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한 박지성(은퇴)에 이어 두 번째로 빅이어를 든 한국 선수가 됐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 트레블 팀의 일원이 된 이강인은 시상식에서 무대 중앙 쪽에 자리를 잡고 동료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눠 눈길을 끌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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