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부모가 갑자기 증발했다. 중앙당 대외연락부 소속이던 차영철은 부모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탈북을 선택했다. 20년째 찾고 찾았지만 부모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인터뷰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기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 국가안전국이 부모님을 납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죄가 없으니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숨어서 살려 했지만,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저를 공개하려 합니다.”
부친 본명은 차세휘. 1946년생으로 2002년 3월 실종 당시 북한 보위사령부 7처 대좌(대령)였다. 해외에 파견된 가장 높은 계급 인물이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에선 한국 안전기획부와 북한 보위부가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다. 부친은 1992년 12월 중국 심양에 ‘고구려구이집’라는 식당을 열었다. 해외에 문을 연 최초의 북한 식당이다. 모친이 식당 지배인이었다. 부친은 ‘차철’ 또는 ‘홍철’이란 위장명을 사용하며 밖으로 돌아다녔다. 그의 공작은 10년 뒤인 2002년 실종으로 막을 내렸다.● 김정일이 파견한 부친
차영철은 1980년 1월 1일 평양시 평천구역 봉남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만수대동상이 걸어서 5분 거리인 모란봉구역 북새동으로 이사했다. 이곳엔 서울로 치면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맞먹는 명품 거리가 있다.차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국가보위부 312호실에서 근무했다. 312호실은 김정일의 ‘3월 12일 방침’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보위부 자금을 만드는 곳이었다. 차 씨가 어렸을 때 부친은 유럽과 남미로 계속 출장을 다녀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차 씨 부친이 보위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한 까닭에 ‘전사자 자녀’ 혜택을 받았다.1952년생인 모친은 평양영화연극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대 출판사를 다녔다. 외가도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다. 해외를 다니며 달러를 주무르는 부친을 만난 덕에 차 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다. 인민학교를 다닐 때엔 평양에 몇 없는 ‘콘트라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고, 모두가 부럽게 바라보는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엔 명문 모란봉제1고등중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이던 13세 때인 1993년 부모와 함께 중국에 나왔다.
부친이 중국에 집중적으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91년부터였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할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부친은 심양시 민정국과 합작해 조선대양무역회사를 만들었고, 심양 북역 바로 뒤에 ‘고구려구이집’을 내고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1993년 보위부 상좌(중령)였던 부친은 김정일이 사인한 파견장을 받고 ‘차철’이란 가명으로 중국에 눌러앉았다. 평양에 있던 가족도 심양으로 불러왔다. 중국에 나올 때 모친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보위부에 입대했다.
해외에 생긴 최초의 북한 식당이란 명성이 알려지면서 고구려구이집은 한국인들도 많이 찾았다.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의 지배인이 보위부 요원인 줄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종업원도 보위부 5과 출신 미녀였고, 요리사도 평양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를 데려왔다. 심양에서 살게 된 차 씨는 서탑조선족학교를 다녔다. 1년쯤 다녀 중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한족 학교인 132중학교로 옮겼다.
● 자강도를 살린 식량 10만 톤
차 씨는 설날 때 평양에 사는 할머니와 다른 친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빼고는 늘 중국에서 살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차 씨는 전혀 몰랐다. 평양에 들어갔을 때 함께 놀던 친구들 집은 다 부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친은 이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식당 경영을 모친에게 맡긴 부친은 태권도 5, 6단 사범 3명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밖으로 나돌았다. 어느 날 부친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자강도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이 찾아왔다. 부친의 진짜 신분은 북한에서도 비밀이었지만,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총리를 지낸 연형묵은 알고 있었다.
연형묵은 부친을 차에 태우고 자강도로 향했다. 하루 종일 거리 곳곳에 쓰러진 죽음들, 누더기를 입고 몰려다니는 꽃제비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 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 부친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웠군요. 제가 돕겠습니다.”
중국에 돌아온 부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동원해 식량을 마련해 북한으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식량이 3년 동안 10만t을 넘었다. 당시 중국 기업인들이 부친에게 상하이 같은 주요 도시에 몰래 땅을 사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으니 투자하라고 많이 권했다. 하지만 부친은 가진 돈으로 식량을 모두 구입해 북한에 보냈다.
어느새 자강도에서 차철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식량을 보내 준 사람 이름이 차철인지 홍철인지, 북한 국적인지 해외 재력가인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소문이 김정일 귀에도 들어갔다. 김정일은 화가 났다. 북한의 모든 혜택은 김정일 이름으로 시행돼야 했다. 돈을 벌어 자신에게 바치라고 중국에 보냈더니 제 멋대로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는 데 써버렸다.
부모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가면 당 규율을 위반한 죄로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때 연형묵이 나섰다. 그는 김정일을 만나 부친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며 “이번은 애국한 것으로 쳐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 최홍희가 키운 남파간첩 사범들
차 씨는 중국 학교에 다니면서도 중국어(국어) 수학 물리 등에서 늘 우등 성적을 받았다. 중국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조선 학생이 너희들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1996~1997년에는 심양에 새로 생긴 ‘You too can speak English’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영어학원도 다녔다. 학원 선생님은 미국인과 캐나다인들이었다. 차 씨는 그때 같은 반 한국 여학생을 울렸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여자애가 ‘너희 북한은 못살아. 생긴 것도 이상해’라고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이 남조선 괴뢰야. 너넨 국민들 죽이잖아. 그리고 내가 더 잘 사니, 네가 더 잘 사니. 거지는 바로 너야’라고 쏘아붙였어요. 여자애는 결국 울었습니다. 그걸 보니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 것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수건을 건네주고 화해를 하긴 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그 애도 이젠 40대 중반일 텐데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하네요.”
심양엔 가끔 외삼촌 홍원희도 놀러 왔다. 홍원희는 북한의 유일한 태권도 7단 사범이었고 인민체육인이었다. 1980년대 조선태권도연맹 남자 태권도 사범팀 감독을 지냈고, 1980년대 말 평양에 광복거리가 건설된 뒤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선물로 받을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다. 외삼촌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아내와 함께 파견 나간 페루에서 특공경찰 훈련 교관을 지냈다. 그는 중국을 거쳐 해외로 갈 때마다 심양의 누나를 찾아왔다.
“외삼촌은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남파 임무도 몇 번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1981년 최홍희(전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북한에 들어와 44명으로 제1기 사범 요원 교육을 시작했을 때 김정일 지시로 대남 공작원 출신들이 교육생으로 파견돼 배웠습니다. 최홍희는 10년 이상 배워야 할 동작을 북한 교육생들이 7개월 만에 습득했다고 좋아했지만, 실은 이들 모두 최정예 요원들이었던 겁니다.”
차 씨는 19세 때인 1999년 132중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은 그를 칭화대(清華大)에 보내려 했다. 하지만 6년 동안의 중국 생활이 지겨웠던 차 씨는 평양에 돌아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부친은 그를 평양외국어대 중국어과로 보냈다. 나이가 많아 또래들이 다니는 2학년에 학생이 아닌 보위부 위탁생 신분으로 들어갔다. 위탁생은 졸업 후에 파견 기관으로 돌아가는 학생을 의미한다.
● 평양을 주름잡은 ‘날라리’
중국에서 한족 학교를 6년 다닌 그에게 평양외대 중국어과는 의미가 없었다. 부모의 통제도 없는 데다, 집에 달러도 가득하니 이때부터 본격적인 탈선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관리하는 차 중에 평양에 몇 대밖에 없는 닛산 세드릭을 몰고 고려호텔, 양각도호텔 같은 비싼 호텔에 가서 놀았다. 이 호텔들 노래방에서 중간 크기의 방을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70달러 정도에 빌렸다. 두 호텔을 비롯해 모란봉숙소, 정보센터, 보통강호텔, 평양호텔, 해방산호텔, 서산호텔, 창광호텔, 청년호텔 등 달러만 있으면 쓸 곳은 많았다. 매일 수백 달러씩 쓰면서 흥청망청 살았다.
20세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차 씨를 모르는 평양 교통안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안전원이 차를 세우고 징글징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건 10달러 정도 뇌물을 달라는 의미였다. 2학년 때 6개월씩 군에 가야 하는 교도생활을 돈으로 빠진 뒤 친구들과 묘향산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그에게 잘 보여 돈을 받으려는 영화배우들이 줄을 섰다.
하마터면 김정은 집안사람이 될 뻔도 했다.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들어온 김일성 가문의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같은 외대 학생인 이 여성은 평양에서 유일하게 노랑머리를 하고 다녔다. 차 씨와 여자친구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녀도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가끔 뭐라고 하는 교수가 있긴 했지만 달러를 찔러주면 입을 다물었다.
놀이공원에 가면 차림새 때문에 누구도 이 두 사람을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줄도 서지 않고 놀이기구 앞에서 “조총련 관광단인데 빨리 좀 탑시다”라고 하면 무사통과였다. 가끔 시비를 거는 단속원들에게 외삼촌이 만들어 준 영어가 잔뜩 쓰인 국제태권도연맹 2단 사범증을 내밀면 기가 죽었다. 영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해외에서 온 사범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단골상점은 일본 상품만 전문으로 파는 보통강상점이었다. 그 상점에서는 피랍된 일본인 여성이 금목걸이와 금반지 매장에서 일했다. 승합차가 그녀를 상점에 태워다 주고 또 퇴근 때는 데려 갔다.
그 일본인 여성은 단골인 차 씨를 볼 때마다 늘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2002년 9월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하고, 그중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보통강상점 그 여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2005년 12월 차 씨가 중국으로 나올 때까지도 그 상점에서 일했다.
● 갑자기 전해진 부모 실종 소식
2002년 북한에서 최초로 10만 명이 참가하는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 외대 학생들도 집단체조에 동원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하게 훈련했다. 차 씨는 늘 그랬듯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후방 물자를 조달하는 ‘후방조’라는 명목으로 달러를 내면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해 4월 달러를 전달하기 위해 모처럼 훈련장에 나타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 친구들이 그에게 오더니 “별일 없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네 아버지, 어머니가 남조선에 가서 기자회견 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니겠지”라는 것이었다. 차 씨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평양외대는 고위 간부 자식들이 많이 다니고 있어 소문이 빨랐다. 차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북한에 오지 않은 지 꽤 됐다. 부모는 평양에 오면 집에 오지 않고 ‘장군님(김정일)의 배려’라며 묘향산, 정방산 특각, 문수초대소 등에서 1주일을 지내고 해외로 나갔다. 초대소에 갈 때는 신형 벤츠를 탔는데 그 뒤로 의료진과 경호원들이 탄 렉서스 승용차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부친은 김정일이 특별히 우대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평양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늘 겸손하게 살라고 훈계했지만 20세를 넘은 아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처럼 해외에서 일하면서 가끔 북한에 출장 오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려 했다. 물론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2000년 부친은 보위부에서 군부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로 부서를 옮겼다. 7처는 해외파견처로 보위사령부 안에서도 노른자위였다. 기존 국가보위부 312호실은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 실장과 정치부장 모두 처형됐다. 처형된 이들은 중국에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5성급 호텔을 잡아 주고 2만 달러씩 용돈을 주던 사람들이었다.
심화조 사건은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이 조작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숙청된 전체 간부는 2만5000여 명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위부 숙청을 보위사령부가 담당했는데, 312호실 소속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부친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숙청 광풍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김정일의 확실한 신임을 받던 부친이 모친과 함께 남조선으로 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차 씨는 여기저기 알아봤다. “네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잘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상관이자 중장인 7처장도 그에게 전화해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즉시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부모가 사라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집에 있는 돈은 실컷 쓰고 죽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더욱 방탕하게 살았다.
호텔에서 매일 수백, 수천 달러씩 뿌려 대자, 누군가 대학에 신고했다. 대학에선 그를 퇴학시키려 했다. 이때 7처장이 대학에 직접 찾아와 학장과 당 비서를 면담했다. 7처장은 차 씨를 불러 “아버지 어머니 소문은 허튼 소문이니 방랑하지 말라. 당만 믿고 학교 생활 잘하라”고 당부했다. 부모가 실종된 지 1년이 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차 씨 마음도 조금 진정됐다.
● 신병훈련소에서 탈영하다
2003년 10월 차 씨는 대학을 졸업했다. 공교롭게도 그해에 모든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군 의무 복무하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보위사령부에서 연락이 왔다. 일단 군에 입대해 신병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평양 소재 대학 졸업생들은 차에 실려 평남 개천비행장에 있는 신병훈련소로 이동했다.
차 씨도 이번만큼은 빠질 수가 없었다. 북한 최고 숙박시설에서 살던 차 씨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병실은 냄새가 너무 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잡곡밥에 시꺼먼 염장무국과 반찬이 나왔다.
“이건 짐승이 먹는 것이지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다.”
이때부터 그는 단식에 들어갔다. 며칠 먹지 않으니 정치지도원이 찾아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정치지도원이 차려준 두부와 된장찌개로 며칠 만에 숟가락을 뜰 수 있었다. 차 씨가 “죽어도 신병 생활을 못 하겠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정치지도원은 여단에 가서 자필 제대 탄원서를 써보라고 했다.
다음날 차 씨는 훈련장을 이탈해 여단 사령부로 찾아가 제대 탄원서를 써서 냈다. 담당 군관이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다간 신병훈련소로 끌려갈 것 같다는 느낌에 무작정 큰길로 뛰쳐나와 아무 차나 잡으려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평양 번호판을 단 승용차가 나타났다.
차를 막아선 그는 달러를 줄 테니 평양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운전기사는 10달러를 불렀다. 돈이 없던 차 씨는 평양에 도착하면 3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2시간 만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며칠 새 삐쩍 마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놀랐다. 집에서 저녁을 배 터지게 먹고 나니 잠이 왔다.
새벽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가 서 있었다. 탈영은 군법 적용 사건이다. 욕을 잔뜩 먹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좌는 뜻밖에도 “영철아, 건강이 어때?”라고 살뜰하게 물어보더니 종이를 꺼냈다.
깜짝 놀랐다. 어제 여단에 써 놓고 온 제대 탄원서였다. 보위사령부에 그가 탈영했다는 직보가 들어가자 7처장은 탄원서부터 회수해 증거를 없앤 것이다. 대좌는 “3개월 동안은 신병훈련 기간이니 집에 조용히 박혀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물론 차 씨는 이 당부를 지키지 않았다. 그 3개월 동안 태권도 사범 형들과 실컷 놀러 다녔다. 가끔 7처에서 전화가 와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어제 거길 왜 갔냐”는 추궁을 받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또 놀러 나갔다.
3개월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신병 때 입은 군복차림으로 보위사령부 정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전날까지 호텔에서 먹은 술이 깨지도 않은 채 사령부로 가니 견장에 두 줄이 박힌 새 군복을 주었다. 신병훈련을 마친 것으로 서류가 정리된 것이다. 7처장이 말했다. “3년 복무는 장군님 방침이니 빠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보내 주는 곳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라.”
그를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평양시 역포구역 보위사령부 당 강습소 경비부대였다. 부대원들 부모는 내로라하는 간부들이었다. 한마디로 ‘금수저’들이 편하게 근무하며 경력을 만드는 부대였다. 밥도 이밥이 나왔고 돼지고기와 오리고기도 정기적으로 나왔다. 차 씨는 그때 비로소 잘 먹는 부대가 있고, 못 먹는 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중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되다
경비부대에서 10개월도 채 보내지 않았을 때 김정일의 새 지시가 하달됐다. 군에 보낸 대학 졸업생 중 외대와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 음악무용대학 기악부 졸업생은 제대시키라는 것이었다. 군 3년 동안 외국어나 악기 다루는 법을 잊어 버리니 예외를 적용하라는 뜻이었다. 차 씨의 군 생활은 신병까지 포함해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 복무 경력까지 얻게 됐으니 운이 매우 좋았다.
2004년 10월 외대 운동장에 차 씨처럼 군에서 돌아온 졸업생들이 모였다. 몇몇 간부들이 단상에 올라 “장군님의 배려”를 운운하더니 한 명씩 불러 간부 선발 면접을 보게 했다. 며칠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차영철 동무는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됐습니다.”
대외연락부는 남한 지하당 구축을 전담하고 조총련 사업도 지도하는 부서다. 어디 가서 증명서를 꺼내 보이면 아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끗발이 세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간부 면접을 본 외대 졸업생 1000명 중에 대외연락부에 선발된 사람은 차 씨 포함 단 2명이었다.
차 씨를 데리려 차가 왔다. 그가 소속된 부서는 대외연락부 116연락소였다. 116연락소는 김정일의 ‘1월 16일 방침’으로 만든 부서로 항일 빨치산 출신 이을설 원수의 사위가 소장으로 있었다.
차 씨의 첫 임무는 광복거리에 있는 청년호텔에 가서 중국에서 온 기술자들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과 중국이 각각 2500만 달러를 투자해 평양사탕가루공장을 짓고 있었는데, 설비와 기술자들은 모두 중국에서 왔다.
차 씨는 이 기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주로 통역을 했다. 발령 받은 첫 직업이 호텔에서 생활하며 외국인들과 고급 식사를 하는 일인 셈이었다. 생활총화도 없었다. 차 씨와 함께 대외연락부에 온 친구는 “너는 생활총화를 하지 않아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차 씨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부모가 실종됐음에도 자신이 잡혀 가지 않고 오히려 중앙당에 발령받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에게서 큰 비밀을 알게 됐다.
“너희 아버지는 몇몇 군부 간부들이 외국에 몰래 무기를 팔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김정일에게 이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보위사령부가 가로챘지. 보위사령관도 이에 연루가 됐는데, 아버지를 어찌 할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에 실종이 벌어진 거야.”
이 말을 듣고 차 씨는 보위사령부가 왜 자신을 지금까지 보호했는지, 대학 졸업 후 당연히 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보위사령부가 아니라 중앙당으로 옮겨 오게 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뒷배라고 생각했던 보위사령부는 더 이상 믿을 곳이 아니었다. 결심이 굳어졌다.
“이 나라를 빨리 떠야겠다. 심양에 가서 부모를 찾고 진실도 알아야겠다.”
● 중국에서 탈북을 선택하다
차 씨는 해외로 파견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중국 유력 재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소문도 열심히 돌렸다. 실제로 심양에서 6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와 거래하는 많은 기업인을 알게 됐다. 그중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인 중 최고 부자로 알려진 조교(북한 국적 재중 조선족)도 있었다.
소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나이 많은 남성이 그를 찾아왔다. 국가과학원 소속 모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중국에 식당을 차리려 하는데, 여기에 투자해 줄 수 있는 인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차 씨가 인맥 정보를 말하자 그는 “소속을 국가과학원으로 옮겨 줄 테니 나와 함께 중국에 한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차 씨는 쾌재를 불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속이 가 본 적도 없는 국가과학원으로 변경됐고 중국 출장단에 이름이 올랐다. 보위부에서 차 씨 아파트를 찾아 ‘요해사업’을 벌였다. 해외 파견되는 사람들의 주변을 조사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다행히 차 씨 아파트 사람들은 그에 대해 모두 좋게 이야기해 주었다.
2005년 12월 5일 차 씨는 한 달짜리 중국 출장을 허락받고 그 사장과 함께 신의주에 갔다. 여권에 적혀 있는 차 씨 생일도 1977년생으로 고쳐져 있었다.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임무를 주었다.
첫 번째 임무는 투자자를 물색해 심양에 식당을 차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 임무는 탈북자들이 거쳐 간다는 연길의 모 한국인 교회 목사 연락처와 탈북 루트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또 매주 한 번씩 신의주로 나와 경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미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씨에겐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둘은 차를 타고 단동으로 넘어가 다른 차로 갈아타고 심양에 도착했다. 첫날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부모가 운영했던 식당을 찾아갔다. ‘고구려구이집’ 간판은 사라지고 한족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에겐 참 추억이 많은 식당이고 부모님의 흔적이기도 해요. 1990년대 심양에 갔던 한국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때 찍은 식당 사진이 있다면 꼭 찾고 싶어요.”
그 다음날 차 씨는 홀로 택시를 타고 심양 기차역으로 갔다. 청도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오래 계획했던 일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
“함께 중국으로 나왔던 사장에겐 미안하죠. 그런데 그 사장의 정체를 모르겠어요. 사장은 국가보위부 업무를 협조해 주는 대가로 보위부 요원에게만 주는 국경통행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만 석연치 않은 게 많았죠. 국가과학원이 감히 중앙당 대외연락부 사람을 빼내 자기들 소속으로 바꿀 수 없거든요. 또 탈북 루트를 파악하는 임무도 그렇고. 어쩌면 보위부나 보위사령부에서 저를 미끼로 내걸고 사라진 부모님 행방을 찾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고요.”
● 중국인으로 살다
차 씨는 어렵지 않게 청도의 중국인 지인을 찾아 숨어들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 차 씨는 ‘북한 재벌의 아들’쯤으로 인식돼 있었다. 그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실종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사장님 부부를 체포한 것은 중국 국가안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차 씨는 이 외에도 여러 정보를 얻었다. 중국이 “차철은 마약사범이니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북한에 통보한 것도 알아냈다.
“맹세컨대 부모님은 마약에 절대 손대지 않았어요. 중국에서 마약사범은 공안이 다루지 안전부가 다루지 않습니다. 마약이라면 부모님과 함께 일한 사람들도 잡혀 가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북한에 부모님을 송환하지 않을 유일한 구실이 마약사범이니 그렇게 밝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부친 소식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탈북한 신분으로 추적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차 씨는 중국에서 탈북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인 2008년 중국에서 진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북송 위험은 사라졌다. 중국어도 유창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를 한족으로 알았다.
중국에서 체류하려면 돈도 벌어야 하니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그러는 과정에 7세 아래 한족 아내도 만났다.
“2010년에 어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쳤어요. 거의 동시에 끌렸다고 할까. 밥을 같이 먹으면서 사귀자고 했지요.”
당시 중국엔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내는 그를 한국말을 잘 하는 한족 남성으로 알았다. 사귀고 열흘쯤 지나 차 씨는 그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정체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과거는 상관없고 이제부터 우리 둘만 좋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둘은 세계 최대 규모 도매시장이 있어 ‘세계의 슈퍼마켓’이라 불리는 저장성 이우(义乌)시로 옮겨 가 가방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잘됐다.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부부가 각각의 가게도 운영했다. 잘 나갈 때는 직원 8, 9명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져 중국이 봉쇄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장사를 접고 집에 있는 날이 길어졌다. 집에 있다 보니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너는 왜 탈북했지? 초심을 잃었다. 부모를 찾겠다고 와서는 중국에서 돈이나 버는 것이 맞는 일인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차 씨는 아내에게 말했다.
“너를 만나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혼자만 잘 살 순 없어. 부모님을 찾아야 하지만 중국인 신분으로는 어려워. 한국에 가서 한국 국적을 따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면서 부모님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아내는 그의 결심을 적극 응원해 주었다.
● 내가 살아가는 이유
2023년 4월 5일 차 씨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여권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관광객으로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 밤늦게 제주공항에 내렸다. 예약해 둔 호텔에 짐만 내려놓고 인근에 있는 동부경찰서를 찾아갔다.
“저 평양에서 온 사람인데 자수하러 왔습니다.”
“왜 공항에서 자수하지 않고 하필 여기에 왔나요?”
“공항에서 자수한다고 하면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고 같이 왔던 중국인들이 사진을 찍으면 일이 커질까 봐 그랬습니다.”
“달아날 분 같진 않으니 일단 호텔로 가서 자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 갈게요.”
아침 일찍 경찰관이 찾아왔다. 공항에 가니 그를 조사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10명도 넘게 모여 있었다. 기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차 씨는 한국 정보기관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돼 활동하는 요원으로 파악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 신원과 하는 일, 사라진 경위까지도 다 꿰고 있었다. 새삼 한국 정보기관의 정보력에 놀랐다.
초봄에 한국에 왔는데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거쳐 사회에 나오니 어느새 가을이었다. 차 씨는 서울 마포구 임대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살던 곳 중 가장 낡고 작은 방이지만 그럼에도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중국에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온갖 마음고생 끝에 마침내 아내를 국제결혼 형식으로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지난해 2월 인천의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중국에서 살 때는 한국 업체들과 상대했는데, 이번엔 한국에서 중국 업체들과 거래하는 일이었다.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올 5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이 처음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가 깨진 것이다. 이제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북한에서 운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 초년엔 잘 살았는데, 중년엔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 저의 가장 큰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찾은 겁니다. 이제 아버님은 79세가 됐고 어머니도 73세입니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부모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가 부모님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중국 당국이 북한 고위급 인물은 신분 세탁을 해 숨겨 주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탈북한 사람 중에서도 대좌 이상급 인물은 북송하지 않고 북한 유사시를 대비해 관리한다는 것.
“제 부친은 비록 김정일 지시로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럼에도 굶어 죽어가는 인민을 외면할 수 없어 식량 10만 t을 사 보내 처벌까지 받을 뻔했습니다. 상해에 땅을 몰래 사 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도 자기 몫은 챙기지 않았습니다. 해외에 파견된 최고위급이었으니 한국에 온다면 나라에 기여할 정보도 많을 텐데,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차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이 우연히 이 기사를 보고 연락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자신을 공개하는 일밖에 없다. ‘부모 찾아 3만 리’, 20년 넘게 헤매 온 그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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