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이틀뒤 12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제야음악회
슬픔을 추스르기 힘든 연말연초다. 지난달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문화 행사도 줄줄이 취소됐다. 깊은 상실감, 사회적 트라우마에 함부로 폭죽을 터뜨리기 어려운 시절이다. 각종 새해맞이 공연과 지상파 3사의 연말 시상식, 조용필·이승철·김장훈 등 대중가수의 콘서트가 무산되거나 미뤄졌다. 연초 컴백을 앞뒀던 K팝 그룹 아이브와 세븐틴 유닛 부석순은 콘텐츠 공개 일정을 연기했다.
그러나 공연을 열고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의 애도도 있다. 음악이 건네는 위로의 힘이 다른 무엇보다 강할 수도 있다. 혼자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쏟고 마음을 씻어낼 수도 있지만, 여럿이 한 공간에 모여 듣는 음악엔 공감대가 자아내는 또 다른 치유의 효과가 있다.
음악·공연 현장 취재를 맡아 수많은 무대 위 일거수일투족을 눈과 귀에 담는 게 업이지만, 참사 이틀 만인 지난달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제야음악회에선 관객석 모습을 찬찬히 둘러봤다. 추모곡이 흐르는 가운데 가만히 옆 사람과 손을 포갠 사람도, 자기 손을 얼굴 앞에 맞잡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 사람도 보았다.
올해 29회째를 맞는 제야음악회는 매년 터뜨리던 불꽃이나 카운트다운 행사를 없앤 채 열렸다. 일부 프로그램도 변경했다. 애초 예정됐던 첫 곡은 활기찬 춤곡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걱정 없이! 폴카'였다. 클래식 공연계엔 새해 기념 연주로 오스트리아 슈트라우스 일가의 폴카와 왈츠를 호쾌하게 연주하는 전통이 있다. 게다가 올해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탄생 200주년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안네 폴카' 등이 다수 연주됐다.
그런 곡이 국가적 추모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제야음악회는 영국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 '님로드'를 먼저 연주했다. 엘가가 자신이 힘들 때 회복과 치유를 도왔던 친구를 기리며 만든 곡으로,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 추모 공연에서 직접 지휘봉을 잡은 적도 있다. 4분 남짓의 명상적이고 장엄한 선율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지휘자 최수열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도 그 뜻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연주했다. 모든 연주자가 검은색 정장을 입었고, 무대 곳곳에 흰 꽃이 놓여 애도를 표했다. 연주 끝엔 무대를 밝히던 환한 조명이 이례적으로 어두워져 관객들도 함께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 179명을 위해 묵념했다. 이후로도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 슈베르트 '밤과 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저녁노을' 등의 곡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희망을 노래하듯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서곡'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봄의 소리 왈츠'도 연주됐지만, 지휘자와 악단은 마지막 곡으로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을 택했다. 이번 공연이 가진 추모와 위로의 의미를 되새기는 선곡이었다.
음악은 절망적인 순간에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희망의 언어를 대신해주기도 한다. 지난달 공개된 디즈니+의 8부작 오리지널 시리즈 '조명가게'는 불의의 사고로 떠나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특히 고(故)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여러 차례 삽입해 삶의 애틋함을 배가했다. 작품은 초반 무섭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점차 그 이면의 사연을 풀어내면서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이들의 사투를 보여준다. 그중 한 명인 중환자실 간호사 영지(배우 박보영)는 혼수상태인 환자의 귀에 김광석 목소리가 흐르는 이어폰을 꽂아준다. 경계를 헤매다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을 때 이 노래가 들리기를, 빛을 찾아 꼭 돌아오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새해의 설렘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건사해야 한다는 무거움 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고통을 겪은 유가족, 현장 수습 관계자는 물론 사고 소식을 접한 국민 모두 2차 외상의 위험이 높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등 전문가들은 재난 트라우마 극복의 방편으로 가까운 이들과 슬픔과 고통을 나누라고, 사회적 지지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부디 혼란과 혐오에 맞서 진심 어린 마음들이 서로 닿기를, 주변의 작은 온기가 희망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정주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