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구/김이환 지음/375쪽·1만8000원·북다
‘절망의 구’는 ‘워킹데드’와 ‘오징어 게임’을 합친 것 같은 이야기다. 좀비 대신 검은 구(球)가 나타나 접촉하는 사람들을 흡수한다. 구가 어디서 생겨났고 어째서 도시를 덮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도시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들을 헤치고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부모님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남자’가 도달하는 장소에 따라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남자의 집과 부모님의 집 등 남자에게 익숙한 지역, 남자를 받아들여 준 낯선 사람들이 살아가는 학교, 남자와 우연히 마주친 청년이 구를 피해 함께 숨어 있던 마트, 이후 남자가 끌려간 어딘지 모를 장소,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사람들은 검은 구로 인한 대혼란 속에서 강도나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검은 구가 신이 보낸 계시와 관련이 있다는 종교적 신념 아래 모여 지내기도 한다. ‘남자’는 무리 지은 사람들에게 동조하지 못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탈출해서 계속해서 이동한다.
검은 구로 인한 극심한 혼란과 재난 상황은 갑작스럽게 해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사회는 조금 다른 종류의, 어쩌면 더 위험한 혼란에 빠져든다. ‘남자’는 상은 없고 벌만 있는 ‘오징어 게임’ 같은 환경에 내던져진다. 그저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는 정도가 유일한 상이다.
끊임없는 재난과 주인공이 휘말리는 출구 없는 혼란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시종일관 덤덤하다. 빠른 전개와 대비되는 독특하게 차분한 문체가 더욱 강력하게 독자를 휘어잡는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감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숨 돌릴 새 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여름 휴가철에 시원하게 읽어 내려가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동시에 나의 가장 검고 커다란 절망과 불안은 무엇인지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정보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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