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삼킨 세상에서 맞닥뜨린 인간의 본성[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19 hours ago 3

◇절망의 구/김이환 지음/375쪽·1만8000원·북다


‘절망의 구’는 2009년 제1회 멀티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영어로 번역돼 얼마 전 영국과 미국에서 ‘검은 구(The Black Orb)’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래서 김이환 작가의 뛰어난 작품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망의 구’는 ‘워킹데드’와 ‘오징어 게임’을 합친 것 같은 이야기다. 좀비 대신 검은 구(球)가 나타나 접촉하는 사람들을 흡수한다. 구가 어디서 생겨났고 어째서 도시를 덮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도시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정보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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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남자’는 김정수라는 이름이 있지만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남자’라고만 지칭한다. ‘남자’는 서른두 살의 영업직 회사원이다. 평범한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인데, 어느 날 저녁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길에서 검은 구가 사람들을 흡수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상상도 하지 못한 사태를 맞이하여 부모님과 연락하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남자’는 검은 구를 피해서, 그리고 부모님을 찾아서 도망치는 여정에 오른다. 각 지역 발전소와 수도사업본부, 가스회사 등 건물 안에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모두 검은 구에 직원들이 흡수된 탓에 업무가 마비된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지고 인터넷도 모바일 연결도 중단된다. 이런 와중에 ‘남자’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에는 구가 어디서 생겨났으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상점에 진열된 텔레비전 화면에는 정부의 공식 공고가 떠 있는데 그 내용은 혼란이 극심하니 각자 알아서 군부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협조하라는 대체로 쓸모없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들을 헤치고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부모님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남자’가 도달하는 장소에 따라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남자의 집과 부모님의 집 등 남자에게 익숙한 지역, 남자를 받아들여 준 낯선 사람들이 살아가는 학교, 남자와 우연히 마주친 청년이 구를 피해 함께 숨어 있던 마트, 이후 남자가 끌려간 어딘지 모를 장소,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사람들은 검은 구로 인한 대혼란 속에서 강도나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검은 구가 신이 보낸 계시와 관련이 있다는 종교적 신념 아래 모여 지내기도 한다. ‘남자’는 무리 지은 사람들에게 동조하지 못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탈출해서 계속해서 이동한다.

검은 구로 인한 극심한 혼란과 재난 상황은 갑작스럽게 해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사회는 조금 다른 종류의, 어쩌면 더 위험한 혼란에 빠져든다. ‘남자’는 상은 없고 벌만 있는 ‘오징어 게임’ 같은 환경에 내던져진다. 그저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는 정도가 유일한 상이다.

끊임없는 재난과 주인공이 휘말리는 출구 없는 혼란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시종일관 덤덤하다. 빠른 전개와 대비되는 독특하게 차분한 문체가 더욱 강력하게 독자를 휘어잡는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감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숨 돌릴 새 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여름 휴가철에 시원하게 읽어 내려가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동시에 나의 가장 검고 커다란 절망과 불안은 무엇인지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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