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통장 보자"…영혼 털리는 전세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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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반포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전세를 내놓은 집주인의 조건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집주인이 “대화가 잘 통하는 상식 있는 전문직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세입자 신원조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전문직 세입자는 집을 덜 훼손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공인중개사의 만류에도 집주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물건은 등록한 지 1주일도 안 돼 전세 계약이 체결됐다.

4일 부동산 중개업계에 따르면 최악의 전세난 속에 집주인이 ‘갑(甲)’으로 군림하고 있다. 미취학 아동이 있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세입자를 기피하는 일은 심심찮다. 조그만 오염이나 낙서에도 집 전체 도배 비용을 변상하게 하는 특약을 강요하고, 계약 직전 조건을 변경하는 사례가 잦아졌다. 세입자의 통장 사본과 신분, 직업까지 면접 보듯 검증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비교적 전세 물건이 많은 수도권 외곽으로 떠밀리는 전세 난민이 늘고 있다. “집 구하기가 대기업 취업 문을 넘기보다 더 까다로워졌다”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한국부동산원 기준)은 올해 들어 2.4% 오르는 등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24년(5.2%)과 지난해(3.8%)까지 합치면 약 2년 반 만에 11%가량 뛰었다. 서울 아파트 전세 물건은 1만5403개(아실 기준)로 2023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저 수준이다. 대단지인 노원구 보람아파트(3315가구)와 성동구 센트라스(2519가구)의 전세 물건은 각각 0개, 1개다.

전세 품귀는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감소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실거주 의무 강화, 비(非)아파트 시장 위축, ‘임대차 2법’에 따른 매물 잠김 등도 전세난을 부추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1~2년 안에 지을 수 있는빌라와 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공급을 서두르고, 장기적으로 재건축·재개발을 촉진해 아파트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은 “전세 물량 품귀로 서민이 외곽으로 내몰리고 집주인의 요구 조건이 도를 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며 “3기 신도시나 택지지구 물량은 오랫동안 임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오상/정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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