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순진무구는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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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루 라군’ 포스터. ‘순수한 사랑 이야기’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온다. 순수한 건 좋은 걸까. 사진 출처 imdb

영화 ‘블루 라군’ 포스터. ‘순수한 사랑 이야기’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온다. 순수한 건 좋은 걸까. 사진 출처 imdb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앙팡 테리블. 무슨 귀여운 반려견의 견종 같지만, ‘무서운 아이들’이란 뜻의 프랑스어예요. 프랑스 범죄영화의 거장 장피에르 멜빌 감독이 장 콕토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한 동명 영화(1950년)엔 말 그대로 무서운 아이들이 나와요. 첫 장면이 방과 후 벌어진 소년들의 눈싸움 장면인데, 주인공인 소년 ‘폴’은 급우인 ‘다르즐로’가 던진 눈덩이를 가슴에 맞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기절해요. 다르즐로가 눈 속에 돌멩이를 넣었거든요. 그러나 교장에게 불려간 다르즐로를 폴은 “그냥 눈뭉치였을 뿐”이라며 감싸요. 왜냐고요? 마음씨 착해서가 아니에요. 폴이 거칠고 야성적인 다르즐로에게 동성애를 느껴왔기 때문이죠. 집으로 돌아간 폴은 누나 ‘엘리자베트’와 침대를 나란히 두고 한방에서 자는데, 누나는 남동생을 돌봐준다며 물고 빨며 난리가 나요. 남매가 함께 지내는 방은 그 어떤 일도 가능한 상상과 자유의 농밀한 폐쇄 공간으로 작동해요. 서로의 면전에서 옷을 훌러덩 벗는 건 기본이고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이른바 ‘최면 놀이’에 탐닉하죠.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목인데, 순간 영화엔 이런 내레이션이 깔려요. “남매간에 쑥스러움 따윈 없었다. 둘은 한 몸에 달린 팔다리와 같았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무슨 저렴한 망발이냐고요? 사회화되지 않은 아이들은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에 필적할 수 있단 사실을 말하려는 거예요. 선악의 개념은 학습되는 것이니, 훈육되지 않은 아이들에겐 동성애과 이성애의 구분도 없을뿐더러 근친상간도 일탈이 아니겠지요. 선로가 놓여 있지 않은 기차에 어떻게 ‘탈선’이 있겠어요?

브룩 실즈가 14세 때 출연한 영화 ‘블루 라군’(1980년)도 그래요. 어린 소녀 ‘에믈리’와 소년 ‘리차드’는 배에 불이 나 표류하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산호초 섬에 당도하는데, 이 무인도에서 스스로 생존하고 성장해요. 둘은 사춘기를 겪으며 성욕에 눈뜨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태초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실현하죠. 근데, 둘은 사촌지간이에요.

‘자연 그대로’ 혹은 ‘순수’란, 아름다움을 담보하는 표현이 아니에요. 원시림은 아름답지 않아요. 그저 혼돈일 뿐이에요.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관리된 ‘정원’에 우리는 오히려 강렬한 미감을 느껴요. 교육, 제도, 법, 도덕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아요. ‘블루 라군’에서 에믈리와 리차드가 구출되지 않았다면? 산호초 섬에는 ‘번식’이 무한 반복되면서 수세기 뒤엔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는 소국(小國)이 형성될 수도 있죠.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자신의 동물원을 만들려고 1980년대에 들여온 하마 네 마리가 번식을 거듭하면서 지금 170마리로 불어나 있듯 말이죠.

[2]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옮긴 흑백영화 ‘파리대왕’(1963년)은 아이들의 본능적 선택과 행동을 통해 인간의 원형적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요. 비행기 추락으로 살아남은 소년들이 무인도에서 살아가는데, 처음엔 이성적 리더 ‘랄프’의 영도력이 빛을 발해요. 소라고둥을 손에 쥔 자만이 회의를 소집하고 발언권을 갖자는 규칙을 세우며 집단 질서를 만들어가죠. 하지만 리더십은 곧 무너져요.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 ‘잭’이 죽창을 만들어 멧돼지를 죽인 뒤 그 고기로 포식(飽食)의 경험을 집단에 맛보이자, 소년들은 잭을 따르며 광기에 휩싸이죠. 죽창을 치켜들고 행진하며 “후려치고 목을 따서 돼지를 잡자” 외쳐대면서 동료를 살육해요. 문명보단 야만이, 공감보단 사냥이 인간에겐 더 본래적이라는 섬뜩한 우화죠.

[3] 이 영화에서 100발짝쯤 더 나아간 영화가 닐 조던 감독의 ‘푸줏간 소년’(1997년)이에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뒀지만 그래도 씩씩한 소년 ‘프란시’가, 마을 사람들의 낙인찍기와 따돌림을 저주처럼 먹고 자라며 사회 전복적인 토막 살인마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겼죠.

‘공동체가 아이를 괴물로 키워낸다’는 이 영화의 관점은 프랑스 누벨바그 걸작이자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1959년)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여기서 소년 ‘앙투안’은 치기 탓에 학교와 부모로부터 문제아로 찍히며 가출해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무실 타자기를 훔친 그는 이내 선의로 타자기를 되돌려주려다 붙잡히면서 문제아에서 범죄자로 발돋움(?)하게 되죠(이 설정은 감독 자신이 10대 시절 계부의 타자기를 훔쳤던 실제 사건에서 가져왔음). 앙투안은 외쳐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아요. 그러니 거짓말하는 게 낫죠.” 괴물 같은 아이들은 태어날까요, 만들어질까요. 현행 14세인 형사미성년자(촉법소년) 기준 연령을 13세로 낮출지를 두고 고민 중이지만, 분명한 게 있어요. 세상 제일 식겁하게 만드는 존재는 고스트페이스 가면을 쓴 채 “헬로, 시드니” 하며 식칼 들고 달려오는 영화 ‘스크림’ 속 살인마가 아니라, 잠자리 날개를 하나하나 뜯어내며 꺄르르 웃는 어린아이란 사실 말이에요. 순진무구는, 공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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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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