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 강릉 단오제에 간 소설가 은모든은 우연히 음악극 무대를 봤다. 제주의 무속 신화 '가믄장아기'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가믄장아기는 바리데기 신화, 심청전과 비슷한 '딸의 고생담'이지만 '효'를 강요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다. 신화 속 가믄장아기는 거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막내딸로, 복을 타고 난 존재다. '너희는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언니들과 달리 '내 복에 산다'고 답했다가 집에서 쫓겨나는데, 오히려 부자가 된 후 걸인잔치를 벌여 부모와 재회한다.
가믄장아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장편소설 <세 개의 푸른 돌>을 최근 출간한 은 작가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젠가 옛 이야기를 다시 쓰는 작업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마음이 동하는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며 "가믄장아기 공연을 보고 '이런 인물이 나오는 얘기라면 써보고 싶다!' 외쳤다"고 했다. 그는 이번 소설 집필을 위해 국악인 유태평양 등 젊은 창작자들의 심청전 공연을 관람하며 "정서적 취재"도 했다.
"비슷한 이야기들에서 딸은 딸이기 때문에 가족의 인정을 받지 못해요. 죽을 고생을 해서 부모를 살리거나 남장을 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겨우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죠. 가믄장아기는 고난을 통해 자기증명을 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유년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세 개의 푸른 돌>을 펼치면 제일 먼저 독자들의 눈에 들어오는 글귀다. 소설은 부모로 인해 유년을 빼앗긴 채 성인이 된 '루미'와 '현'이 서로에게 힘을 주며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그렸다. 효, 가난, 부모의 개안 등의 요소는 가믄장아기와 심청전, 바리데기 설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소설은 여기에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는 10대 소녀 등 현대 여성들의 일상을 포개 공감대를 자아낸다.
군산 출신인 은 작가는 "보수적인 소도시에서 만사 답답해 하는, 불만 가득한 10대였던 것 같다"고 스스로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착한 딸들이 주변에 많았고, 세상의 딸들이 '이기적'이라는 말에 감옥처럼 갇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은 작가의 소설은 젊은 여성들의 우정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그는 "사람마다 본질적인 관심사가 각기 다른데, 제가 늘 생각하는 건 '가족 외에 어떤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누구와 가깝게 지내고 정서적 지지를 나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며 "그렇게 보면 우정과 친구가 행복의 핵심 같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 주인공을 또 다른 소설에 친구나 주변인물로 등장시키곤 한다. '스핀오프(파생작품)'을 즐기는 은 작가답게 이번 소설책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다. 부록 책갈피에 인쇄된 QR코드로 접속하면 또 다른 주인공 '반희'와 배우자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은 작가는 "등장인물을 고생시키지 않고 싶은데 이야기 전개상 어쩔 수 없으니 반희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준비했다"며 웃었다.
2018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은 작가는 한국 문단에서 흔치 않은 전업작가다. 1년에 한 권꼴로 성실하게 책을 낸다. 이번 소설은 그가 출간한 열두 번째 책이자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다작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아니에요. A작가는 저보다 한 권 더 썼고요, B작가는 1년에 두 권도 내고요…." '모범답안'이 준비돼 있을 정도로 주변 문인들에게도 '성실한 작가'로 통한다. 그는 "다음 책은 이쯤에서 첫 에세이집으로 변화구를 줘볼까 생각 중"이라며 "관객이 몰리지 않아도 기세를 보여주는 무대인들 보면서 자극을 받는데, 서울에서 예술을 즐기며 잘 노는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