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SGX 원·달러 선물 거래 143% 급증
·글로벌 변동성·투기적 수요 증가 원인
·원화 위상 제고, 자금 변동성 확대 우려
올해 들어 싱가포르 증권거래소(SGX)의 원·달러 선물 시장이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와 관련 구조적 변화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원화의 글로벌 위상이 커졌다는 의견도 있다.
140% 이상 거래 급증
21일 SGX에 따르면 지난 5월 SGX에서 원·달러 선물의 일평균 거래량은 전년 동월보다 143% 급증한 3만8294계약(약 6억8,500만 달러 상당)을 기록했다. 월간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SGX는 “같은 시기 대만 달러의 이례적 변동성이 한국 원화 등 신흥 아시아 통화로 파급되며 투기 및 헤지 수요를 크게 자극했다"고 설명했다.
원·달러 선물 거래 증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원화 선물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작년 10월 SGX에서 원·달러 선물의 일평균 거래 규모는 전년 대비 150% 증가했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SGX 전체 FX 선물 거래도 증가하고 있다. 올 6월에 전년 대비 50% 늘어 월간 670만 건에 달했다. 원화뿐 아니라 아시아 통화 전체적으로 선물 수요가 크게 늘었다.
주로 외국계 은행과 글로벌 투자기관이 원·달러 선물 거래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외환거래 시장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통화 거래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투기적 베팅도 늘어
지난 5월 원화 선물의 급등세는 헤지펀드의 투기적 베팅도 한몫했다. 같은 시기 대만달러가 단기간 급등하자 일부 헤지펀드는 '다음은 한국 원화'라며 원화 가치 상승에 베팅하는 파생상품 거래를 늘렸다
SGX는 "SGX 원화 미니선물 상품 시장에 신규 참여자가 대거 유입돼 유동성이 많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미니선물 상품 시장은 기존의 선물 계약 상품에 비해 거래 단위가 작은 파생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이다. 해당 신규 참여자엔 소규모 글로벌 펀드, 패밀리오피스 등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의 환 헤지 거래도 늘고 있다. 한국 주식·채권시장에 투자한 해외 연기금·펀드들은 원화 환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원화 선물이나 NDF(역외선물환)에 포지션을 구축한다. 관련해 SGX 선물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전에는 한국 내 은행과 선물환 거래를 주로 했다. 하지만 최근엔 싱가포르 시장의 깊은 유동성과 긴 거래시간을 선호하여 역외에서 원화 환 헤지를 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원화 수요 및 헤지 거래도 증가 추세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거나 원화로 거래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환율 변동에 대비해 원화 NDF/선물 포지션을 통해 사전 헤지 포지션을 유지한다. 이런 수요 역시 SGX의 원화 선물시장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미국에서 촉발
SGX 원화 선물 거래량의 급증 요인은 복합적이다. 최근 몇 년간의 글로벌 환율 정책 변화와 시장 구조 재편이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2020년대 초부터 진행된 미국의 급격한 통화 긴축과 금리 인상 사이클은 전 세계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키우고 구조적 변화로 이어졌다.
2022~2023년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 금리를 0%대에서 5%대로 가파르게 끌어올리자 투자자금이 미국 달러로 몰리며 글로벌 달러 강세가 나타났다. 이로 따라 신흥시장 통화 가치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국 원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2022년 한때 달러당 1440원을 돌파하며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의 원화 약세(달러 강세)를 기록하기도 했다.
2022년 초에는 1190원 수준이던 원·달러 환율은 같은 해 9월 1440원까지 급등했다. 2023년 초에는 1230원대까지 급락했다가 다시 2024~2025년 기간 1300원 후반대로 상승하는 등 롤러코스터를 탔다.
환율 변동성이 극심해지자 투자자들의 환리스크 관리 필요성이 급증해 원화 선물과 같은 헤지 수단의 수요가 구조적으로 확대됐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영향도 있다는 분석이다. 2017~2020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달러 약세'를 선호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인세 인하, 자본귀환 독려, 금리인상 압력 등 정책으로 미국으로 자금 유입이 늘어났다. 달러가 강세를 나타냈다. 이런 달러 강세는 국제 교역의 불균형을 심화하고 신흥국 통화 약세로 이어졌다. 한국 원화 역시 약세 압력을 받았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글로벌 환율 갈등도 주목할 배경입니다. 2019년 미국 재무부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등 미·중 무역분쟁이 환율전쟁 양상으로 번지면서 각국 통화 정책이 자국 통화 가치 방어 또는 절하를 고민했다.
환 헤지 수요도 급증
국내 원화 환 헤지 수요 증가도 SGX 거래량 급증 원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국내증권투자 규모가 월평균 223조원 수준으로 전년보다 증가했다. 이는 원화 환율 상승(원화 약세)에 대비한 외국인의 환 헤지 거래를 증가시킨 주요 배경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외환은행들의 비거주자와의 거래가 작년 하루 평균 249억7000만 달러로 전년보다 11.0% 늘었다. 상당 부분이 NDF 등 역외 헤지 거래로 추정된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한국 주식·채권에 투자할 때 원화 환율변동 위험을 피하는 것이 필수다. 보통 이들은 선물환 및 통화스와프 거래를 국내 은행과 맺어 환 헤지를 해왔다. 하지만 국내 금융 규제로 거래 한계나 시간 제약 때문에 역외 NDF 시장을 병행 활용해왔다.
SGX 원화 선물 시장의 급성장은 글로벌 통화시장 구조의 변화 조짐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원화 선물 거래 증가는 원화가 글로벌 투자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글로벌 FX 시장에서는 엔화, 위안화 정도만 일정 비중을 차지했다, 원화는 주변부에 머물렀다. 원화는 아직 역외거래가 제한적이지만 선물시장을 통해 국제 통용성을 얻어가고 있다.
원화는 보통 '신흥국형 경기·위험 지표' 성격이 있다. 한국 경제가 대외 민감도가 높고 제조업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순환이나 위험선호 변화에 원화 환율이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국제 투자자들은 원화 자산을 글로벌 포트폴리오 헤지에 활용해왔다. 원화 선물의 유동성 증가로 그 효용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평가다. 원화 선물 가격은 이제 한국에서 발생하는 요인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원화는 미국 통화정책, 중국 경기, 지정학적 위험 등 동아시아 및 글로벌 변수들에 대한 종합적인 기대치를 담는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원화 위상 진짜 높아졌나?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원화 선물 등 파생상품 거래가 활발해졌다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원화 자산 매매가 더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외국인들은 원화에 대한 헤지 수단을 확보해 한국 주식·채권 등에 더 적극적으로 투자할 여건이 된다. 이는 긍정적 측면이다.
반면 외국인 자금 유출입의 속도와 규모가 커질 위험도 있다. 헤지 수단이 용이하다는 것은 투자 진입이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탈도 신속해질 수 있다.
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가 높아지면 외국인들은 현물 주식·채권을 매도하고 동시에 원화 선물 시장에서 원화 약세 포지션을 취해 손실을 상쇄하려 들것이다.
SGX는 지난 14일 링크트인 자사 계정에서 "SGX에서 원·달러 미니 선물은 유럽 오전 시간대 원화 가격을 형성하는 사실상 유일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며 "새로운 시장 참여자가 빠르게 유입되며 유동성이 급팽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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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