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새 가구를 사거나 여자 친구를 만들어. 황당한 꿈 꾸지 말고.”
미국 뉴욕 교통국에서 일하는 중년 남자, 조(빈스 본)가 식당을 열겠다고 하자 절친이 쓴소리를 던진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 조는 폐업한 이탈리안 식당을 우연히 발견하고 임대 계약까지 덜컥 해버렸다.
“진짜 ‘논나’(이탈리아 말로 할머니)들이 만드는 진짜 이탈리아 음식을 내놓고 싶어.”
넷플릭스에서 미국의 ‘어머니 날’(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맞아 공개한 영화 <논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뉴욕 스테이튼 섬에서 지금도 운영 중인 식당 ‘이노테카 마리아’의 창업 이야기. 할머니 손맛과 밥집이라니. 따뜻하지만 식상한 스토리가 일찌감치 예상될 것이다.
실제로 <논나>는 늦은 저녁 아무 생각 없이 혼밥하면서 보기에 무난한 선택지다. 그런데 젓가락을 내려놓고도 식탁을 떠나지 않고 꽤 몰입하게 되는, 의외의 영화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스타 배우 하나 없이 넷플릭스 인기 영화 10위권(국내 기준)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의 연속이다. 뉴욕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네. 친척들이 주말에 몰려와 와인을 마시고, 주방에선 할머니와 어머니가 한 솥 가득 수프를 끓이고 파스타 반죽을 한다. 조의 어린 시절 회상. 추억은 음식과 강렬하게 엮여 있다.
어느덧 중년이 된 조에게 남은 것은 낡은 집과 어머니의 흔적뿐이다. 오랫동안 간병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조는 어릴 때의 그 맛을 재현해 보려고 부엌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으로 식당을 열기로 한 것도 그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간판명은 어머니의 이름을 딴 ‘이노테카 마리아’.
그도 믿는 구석은 있다. 엄마의 육십년지기 친구이자 투덜이 할머니인 로버타(로레인 브라코)를 요양시설에서 모셔 온다. 이탈리아 식자재 시장에서 만난 안토넬라(브렌다 바카로), 낯선 경력의 테리사(탈리아 샤이어), 여전히 ‘핫한’ 미용사 지아(수전 서랜든)에게도 주방을 맡긴다.
한국으로 치면, 평범한 할머니들이 그 손맛을 인정받아 한식당 셰프가 되는 셈이다. 이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뻔한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시절 여자란 이유로 요리사의 꿈을 뒷전에 뒀던 회한, 남편과 자식들에게 ‘뒤늦은 일탈’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답답함, 숨겨진 재능을 찾았지만 너무 늦어버린 안타까움, 그런데도 노구를 불사르는 비범한 열정과 성찰 등등.
그런데 <논나>의 할머니들은 인생에 대해 아름다운 훈계를 늘어놓는 캐릭터가 아니다. 첫인사도 하기 전에 상대방의 고향에 대해 사이좋게 침을 뱉어주는, 거침없고 유치한 할머니가 다수다. 각자의 레시피(요리법)에 자부심과 고집을 갖고 있어, 이들의 충돌은 투닥거림을 넘어선다.
이 과정의 티격태격 코미디는 재미있지만, 살짝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 씬들이 볼만한 것은, 노인을 억지로 희화화하는 요소가 적기 때문이다. <논나>는 불편한 몸, 깜빡하는 정신 때문에 벌어지는 노년의 실수나 슬랩스틱 코미디 대신, 본연의 캐릭터에 정성을 들인다.
물론 갈등의 봉합은 예측할 수 있는 경로를 통해 이뤄진다. 다소 뻔할 수 있었던 씬들은 노배우들의 호연으로 진실성을 얻는다. 새콤달콤 레몬술 ‘리몬첼로’가 등장하는 중후반 장면은 짧지만 나름의 깊이를 얻는다. 출연진 중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할 수전 서랜든은 의외로 비중이 작은데, 그 존재감은 뒤로 갈수록 빛난다.
노년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죽음과 치매, 간병과 같은 실존적 위기가 막판을 장식하곤 한다. 극의 ‘진실성’을 위해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모르는 척해선 안 된다는 듯이. 물론 비참한 현실을 덮고 ‘하하 호호’ 웃기만 하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찝찝한 뒷맛을 남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노년의 극적 장애물로 삼아 기계적으로 감동을 끌어내려는 것도 문제다. (때때로 작가들은 영화의 막판에 ‘죽음 또는 출산’을 집어넣음으로써, 부실한 스토리를 숨기고 감동을 끌어내려는 유혹을 느낀다고 한다.)
여자의 한스러운 삶, 가족과의 갈등과 화해(특히 자식)라는 ‘신파’까지 끼어들면,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K-할머니 영화'가 된다. 같은 넷플릭스 영화인 <헬머니>(2015)는 시니어 세대를 바라보는(혹은 웃음거리와 감동 거리로 소비하는) 한국 코미디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에 비해 <논나>에는 기계적인 눈물 장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가족과의 갈등이나
친구의 상실 같은 개인적 고통을 겪고 있지만, ‘모두 요리로 극복하겠어!’ 같은 초인적 열정이나 성찰적 태도를 과시하지 않는다. 영화는 노화나 죽음의 슬픔 또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치매나 연애 같은 다소 자극적일 만한 설정도 피해 간다.
스티븐 슈보스키 감독은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맞추는 데 일가견이 있다. 고통스러운 비밀 속에서 우정을 발견해 가는 10대들의 이야기 <월플라워>(2012), 남들과 다른 외모의 아이가 가족의 지지 속에서 성장해간다는 내용의 <원더>(2017)는 그가 대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이다.
할머니들을 아우르는 식당 주인 조는 적절한 존재감으로 균형을 맞춘다. 드라마 <더 베어>가 훌륭히 보여줬던 식당 창업 과정만큼은 아니지만, <논나> 또한 몇 가지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 로맨스가 끼어들고, 외로운 중년인 조의 성장을 이끈다. 실화와의 관련성과 상관없이, 이 부분은 다소 지루하고 빤하게 느껴질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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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나>는 약간 심심한 맛이지만 먹고 나서도 돈이 아깝지 않은, 동네 맛집의 대표 ‘점심 메뉴’를 떠올리게 한다. 예측할 수 있는 맛이지만, 음식이 나오는 과정은 충분히 즐겁다. 넷플릭스 영화에서 때때로 우리가 느꼈던 허탈함을 달래줄 만한 영화다.
김유미 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논나> 공식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