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미국에 협력사들과 4년간 5000억달러(약 712조원)를 투자해 칩, 서버 등 AI 하드웨어를 생산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첨단 제조업 유치 정책에 발맞춰 동아시아에 구축된 엔비디아 공급망을 미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작업이다. 이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사인 SK하이닉스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미국 인디애나주에 짓고 있는 HBM 공장에 추가 투자를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美산 부품으로 슈퍼컴 만든다
엔비디아는 14일(현지시간) 블로그를 통해 미국 내 AI 하드웨어 생산시설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4년간 협력사들과 최대 500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내용이다. 협력사들과 미국 곳곳에 부지도 확보했다. 총면적은 9만3000㎡(약 2만8100평)에 달한다. 엔비디아의 목표는 미국에서 생산된 주요 부품을 활용해 AI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현재 AI 가속기(AI 연산에 특화한 반도체) 블랙웰을 대만 TSMC의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앰코(AMKOR)테크놀로지, SPIL 등 최첨단 패키징(여러 반도체를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기술) 업체들도 인근에 생산시설을 짓고 엔비디아 AI 가속기의 패키징·테스트를 하고 있다.
AI 가속기를 서버 형태의 슈퍼컴퓨터로 만드는 역할은 대만 폭스콘, 위스트론이 담당한다. 폭스콘은 텍사스주 휴스턴, 위스트론은 같은 주의 댈러스에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대량 생산을 시작한다.
엔비디아의 이번 발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업들이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도록 압박하는 관세 정책을 시행하는 가운데 나왔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미국 내 제조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증가하는 AI 칩과 슈퍼컴퓨터 수요를 맞추고 공급망을 강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추가 투자 고심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대만 반도체 회사들이 미국에서 AI 하드웨어 제작을 위해 모이면서 엔비디아에 AI 가속기의 필수 부품인 HBM을 공급하는 SK하이닉스의 고심이 깊어질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생산한 HBM을 엔비디아 AI 가속기를 만드는 대만 TSMC 공장에 보내기 때문에 미국 관세 정책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는 제품이 대만에서 선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미국 내 생산을 늘리면 SK하이닉스는 HBM을 TSMC 미국 공장으로 직접 수출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책정하는 반도체 품목 관세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5000억원)를 투자해 HBM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현재 주거용으로 지정돼 있는 일부 공장 부지를 산업용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 HBM을 대량으로 만들어 현지 TSMC 공장으로 보내면 국내에서 생산할 때보다 관세, 물류비를 줄이고 납품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반도체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미국 공장을 증설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뜻밖의 이익을 거두게 됐다. 미국 공영방송 NPR에 따르면 황 CEO의 대규모 미국 투자 결정으로 엔비디아의 중급 AI 가속기 H20이 중국 수출 규제를 안 받게 됐다. 삼성전자는 H20용 HBM을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