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대 노인 A씨는 국가유공자 연금으로 모은 4875만 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집안 러닝머신 속에 보관했다. 어느 날 그의 딸이 이 러닝머신을 아파트 단지의 분리수거장에 내다 버렸다. A씨는 치매를 앓고 있었고, 가족들은 A씨가 숨긴 돈뭉치의 존재를 몰랐던 탓이다. 그래도 A씨 가족은 운이 좋았다. 부품을 분해하다가 현금다발을 발견한 고물상이 경찰에 신고한 덕에 이 돈은 온전히 주인을 되찾았다. 지난해 4월 경기 안산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치매 어르신 자산, GDP 6.4% 달해
고령 치매 환자의 자산을 뜻하는 이른바 '치매 머니'가 154조원에 이른다는 정부의 분석 결과가 공개됐다. A씨 사례에서 보듯, 인지 기능이 약해진 치매 환자들은 자기 재산을 스스로 관리하기 어려운 만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 6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대 건강금융센터와 공동으로 진행한 '고령 치매 환자 자산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인구의 2.4%인 치매 어르신이 국내총생산(GDP)의 6.4%에 맞먹는 자산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단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고령 치매 환자는 2023년 기준 124만398명이고, 이 중 자산을 보유한 사람은 61.6%인 76만4689명이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자산을 모두 더하면 153조5416억원으로 파악됐다. 치매 머니에는 부동산(113조7959억원)이 가장 큰 비중(71.4%)을 차지했으며 1인당 평균을 내면 2억원 정도였다.
저출산위는 "인구 대비 치매 머니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라며 "치매로 인한 자산 동결이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 차원에서 치매 노인의 자산 규모를 따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단은 2002년 이후 치매 진단을 받아 건강보험을 청구한 환자를 추려낸 다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확보한 소득·재산 자료를 활용해 이들의 총자산 규모를 분석했다. 금융소득 등 일부 자료는 완벽한 취합에 한계가 있어 실제보다 적게 추정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치매 머니는 한국보다 앞서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에서 생긴 말이다. 일본에서는 치매에 걸린 자산가가 급증하고 이들의 자산이 동결되면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가 발생해 왔다. 일본의 치매 머니는 2030년께 수천조원 규모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런 규모의 돈이 돌지 못하면 경기가 활력을 잃게 된다. 또 신탁, 후견인 등의 제도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자산을 처분할 방안이 마땅찮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금융회사들은 치매에 걸렸다고 해도 본인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거래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망 후 상속이 이뤄지기 전까지 사실상 아무도 못 쓰는 '동결 자산'으로 묶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칫 가족 간 재산 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고,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 피해의 먹잇감이 되기도 쉽다. 최근 국내에서도 자식이나 간병인이 치매 노인의 금융정보를 알아내 무단으로 돈을 빼내는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2050년 치매 머니 488조원 달할 것"
한국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조사단은 2050년이 되면 치매 환자가 396만7000명으로 늘면서 치매 머니도 지금보다 세 배 이상 불어난 488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2050년 예상 GDP의 15.6%에 이르는 금액이다.
주형환 저출산위 부위원장은 "고령 치매 환자는 자산을 관리하지 못해 가족이나 제3자에 의한 무단 사용, 사기 등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며 "투자와 소비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된다"고 했다. 저출산위는 앞으로 해마다 치매 머니 규모를 분석해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