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라 믿고 싶지 않은 풍자극[정덕현의 그 영화 이 대사]〈128〉

3 days ago 1

“바보 같은 일이었지. 근데 일어났어. 이건 실제야.”―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디거’ 톰 크루즈가 백발의 석유 재벌 디거 록웰로 등장하는 영화 ‘디거’는 기괴한 미래 세계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디거가 소유한 그린란드의 빙하 시추 시설에 작은 균열이 발견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균열로 떨어져 나온 빙하가 마치 핵폭탄처럼 유럽과 미 대륙을 직격하는 대재난이 벌어진다. 기후위기가 야기한 대재난을 막기 위해 디거와 미국 대통령, 그리고 고위급 인사들이 밀실 대책회의를 하지만, 이들은 마치 바보처럼 황당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이들의 바보 같은 말과 행동들이 연극 무대의 한 장면들이었다는 걸 드러낸다. 그 연극의 제목은 ‘화석 바보들’이다. 즉, 화석연료가 지구를 망가뜨릴 거라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고 결국 대재난을 맞이한 바보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석유가 주는 편리함의 달콤함 앞에 다가올 대재난에 눈과 귀를 막은 바보들의 이야기. “기괴하고 어이없고 바보 같은 일이었지. 근데 일어났어. 이건 실제야.” 놀랍게도 ‘화석 바보들’을 극장에 세운 제작자의 이 말은, 이 황당한 풍자극이 실제 25년 전 벌어졌던 대재난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는 걸 드러낸다. 그래서 재난의 피해자들인 관객들은 연극이 끝나자 극 중 디거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드러낸다. 하지만 갑자기 울리는 경고음에 모두 방독면을 쓰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그건 그저 풍자극이 아닌 실제다. ‘화석 바보들’은 저 디거 같은 자들만이 아닌 우리 자신들이었다는 것.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며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설 때 저 영화 속 경고음이 또 한번 울린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대목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