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인삿말조차 없었다. 암전된 무대를 가로질러 시인 김혜순(70)이 중앙을 향해 걸어들어오자 미리 녹음된 시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졌다. 최근 그가 출간한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실린 '시인의 말'이었다. 무대에 마련된 여섯 의자 중 가장 오른쪽에 앉은 그는 첫 번째 수록작 '그리운 날씨'를 읽어나갔다. 배경음악은 없었다.
지난 19일 저녁 7시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김혜순, 시하다-신작 시집 낭독회'는 약 2시간 동안 오직 시 읽는 목소리로 무대를 채웠다. 김혜순 시인 그리고 유선혜, 안태운, 신해욱, 황유원, 김상혁 등 다섯 명의 후배 시인들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수록작 65편 중 44편을 나눠 읽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난 13일부터 이날까지 주최한 '문학주간 2025'의 폐막식이다.
김혜순 '시인들의 시인'이다. 1979년 '문학과지성' 가을호로 등단해 시집 <당신의 첫>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등을 냈다. 1989년부터 2021년 2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서 많은 작가를 길러냈다. 지난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올해 독일국제문학상 등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낭독회 제목 중 '시하다'란 표현은 시인 김혜순의 시론을 함축한다. 그는 '시를 쓴다' 혹은 '시를 짓는다' 대신에 명사 '시(詩)'와 동사 '하다(do)'를 한몸으로 쓴다. 그에게 시란 언어와 문법, 성별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낭독회에 앞서 이런 문장을 화면에 띄웠다. "저는 이 시들을 쓸 때, 저와 타자, 저와 동물 식물 사물 광물의 경계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시간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도 넘나들었습니다."
낭독회 구성은 솔리스트 김혜순을 위한 협주곡보다는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교향곡에 가까웠다. 후배 시인들과 시 하나씩을 번갈아 읽던 그는 후배들의 낭독에 무대를 내어주거나 행 단위로 작품을 나눠 낭독했다. 예컨대 '쌍둥이 자매의 토크'는 유선혜 시인과의 대화처럼 구절을 주고 받으며 읽었고, '알라모아나'는 모든 시인이 낭독에 참여했다. 심해로 잠기듯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자 시인들은 원고를 올려둔 보면대 조명을 켠 채 낭독을 이어갔다.
이날 무대를 맡은 김현우 연출가는 "김혜순 시인과 상의해 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여러 시인의 목소리를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낭독회를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인사조차 시 '저녁의 인형놀이' 낭독으로 대신한 '하드코어 낭독회'였다. 시인들이 별다른 소감 없이 목례 후 무대를 떠나자 관객들이 한동안 자리를 지켰고 극장 관계자가 "무대가 모두 끝났으니 퇴장해달라"고 안내했을 정도다. 무대 뒤편 화면에는 시 제목만을 띄워 시의 리듬, 때로 중의적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유머를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낭독회를 마친 김 시인에게 기획 의도를 묻자 "2016년 <죽음의 자서전> 출간 당시 오로지 시에만 집중한 방식으로 낭독회를 해봤는데 그때 기억이 좋아 이번에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고 답했다.
"오늘 날씨 좀 봐/밤비 막 내리잖아"('불면의 심포니') 하는 구절이 무색했다.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이었지만 약 150석 규모의 극장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관객이 몰렸다. 김 시인이 여러 차례 시집을 냈던 문학과지성사의 이광호 대표, 김선영 핀드 대표, 박혜진 다람출판사 대표, 박연준 시인, 예소연 소설가 등 문학계 인사들도 자리를 지켰다. 낭독회가 끝난 뒤에는 사인을 받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줄지어 선 관객들의 손에는 시집을 출간한 난다 출판사에서 '난다 시집 시리즈 1호 개업식'을 기념하며 나눠준 카네이션, 장미, 맨드라미 등 꽃이 한 송이씩 들려 있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