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57〉

1 week ago 26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단 한 그루의 보호수단 한 사람의 손길단 한 마리의 추격단 한 가지의 진실단 한 마디의 거리단 한 계절의 온기단 한 시절의 패배단 한 소절의 의미단 한 자리의 물길단 한 가닥의 변명단 한 번의 장난단 한 권의 자살단 한 짝의 마음남아도는 실마리가 없어서우리는 뜻 모를 병명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후략)―이기리(1994∼)누군가로부터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때의 시간은 거리다. 당신과 나 사이, 우리 ‘사이’의 지면을 널찍이 펼쳐 이별을 유예하자는 말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이 보이지 않게, 마음이 보이지 않게 서로에게서 멀어져 보자는 말이다. 이별은 잠시 미뤄졌을 뿐 오고 있다.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로, 언제라도 무성해질 수 있는 이별 한 톨이 심어져 있는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이기리 시인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이 ‘변성기’처럼 온다고 한다. 원래의 목소리와 앞으로 지니게 될 목소리 사이, 울퉁불퉁한 시간처럼 불안정하게 나올 목소리!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이 목소리를 통과해야 한다. 이별이 도사리고 있는 그 초원은 “비좁”기 때문에 단 하나의 무엇만을 지니고 있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사랑과 이별 사이, 연인들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고루 보인다. 보호수, 손길, 추격, 진실, 거리, 온기, 패배…. 이것을 세는 단위가 기이해서 아름답다. 단 한 권의 자살이라니! 사랑으로 얻은 “뜻 모를 병명”들이 서늘하다. 박연준 시인©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