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해서 살면 쾌적한 환경은커녕 방 하나 얻기도 빠듯하죠. 부모님도 오히려 같이 살자 하세요."
서울 동작구에 사는 미혼 김모(41) 씨는 부모님과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 중이다. 그는 "'삶의 공간에 대한 질'이 가장 중요한데 자발적 캥거루족(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성인 자녀)으로서 만족하고 있다"며 "행복도 삶의 질이 따라줘야 가능한 건데, 캥거루족은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선택이다. 물론 부모님도 결혼이나 손주에 대해 아쉬움은 있지만 노후를 자녀와 함께 보내며 즐거워하신다"고 말했다.
독립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득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만, 굳이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김 씨는 "경제 여력이 있어 수도권에 1인 가구 집을 구할 수는 있지만 40평대 편리한 아파트는 어렵다. 전세 사기, 높은 금융이자, 불안정한 고용환경 등을 감안하면 이게 낫다"며 "디지털 시대에 자녀로서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는 부분도 많다. 부정적인 여론은 캥거루족을 살아본 세대에 대한 공감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1인 가구 평균 소득 315만원…생활비만 128만원
이른바 '캥거루족'은 오랫동안 미성숙하거나 독립 의지가 부족한 사람들로 비쳐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30~40대 사이에서도 점점 더 보편적인 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금리·고물가 시대, 천정부지로 치솟는 월세와 현실화하기 어려운 집값은 청년들의 독립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서울시민의 생애과정 변화에 따른 빈곤 위험 대응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수도권에 거주하는 1980년대 초반생 10명 중 4명(41.1%)은 여전히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71~1975년생 22.8%, 1976~1980년생 29.2%와 비교했을 때 최근 세대로 갈수록 부모와의 동거 비율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부모님과 29년째 동거 중인 이연주(29) 씨는 "따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부모님 집 수준의 퀄리티를 내 돈으로 맞추려면 적어도 월 150만원은 들더라"며 "그런데 그 돈을 낼 만큼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건 아니"라며 독립에 대한 환상을 지우게 된 현실을 전했다.
강서구에 거주 중인 개인사업자 강 모(30) 씨도 같은 생각이다. 강 씨는 "우리 동네도 전세 사기 많고 월세도 높다. 그냥 부모님 밑에서 용돈 드리고 사는 게 낫다"며 "나가서 산다고 안전하란 법도 없고, 부모님도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고 부연했다.
수도권 외 지역 출신 청년들에게 캥거루족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KB금융그룹이 지난해 발표한 '한국 1인 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1인 가구의 월 평균 소득은 315만원, 이 중 128만 원(40.8%)이 생활비로 나간다. 2022년보다 생활비 비중이 2.1%P 증가한 수치다. 대출 이자, 전셋값 상승, 식비·교통비 등 각종 고정비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독립을 택한 이들의 고충은 더 크다.
서울 직장 때문에 상경한 정모(27) 씨는 "오히려 캥거루족이 부럽다. 고시원도 살아봤는데 도저히 못 살겠더라. 지금은 조금 나은 원룸을 구했는데도 월 65만 원 넘게 나간다"며 "서울 사는 게 진짜 스펙인 것 같다고 느낀다. 원래 서울이 고향인 동료들이 부럽다"고 전했다.
◇"자식들이 집에서 돈 모으는 게 낫죠"…부모 세대도 '환영'
캥거루족에 대한 시선은 부모 세대에게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50대 부부는 현재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류모 씨(57)는 "같이 사니 딸은 입사 1년 차에 벌써 2300만원을 모았고, 아들은 월급이 적지만 집에 살며 지출이 적어 얼마 전 차도 계약했다"며 "굳이 독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가정은 대부분 핵가족 형태이고, 각자 방이 있어서 생활 공간도 존중되니 큰 불편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에서 30대 초반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50대 이모 씨 역시 같은 입장이다.
이 씨는 "요즘 청년들한테는 집값이 너무 가혹하다. 우리 때는 월급 몇 년 모으면 서울에 전세라도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상도 못 한다"며 "전세 사기, 금리 인상 같은 이슈가 끊임없이 나오니 솔직히 자식이 독립하는 게 더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녀가 독립을 미루는 걸 무책임하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와 함께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지내는 게 더 낫다"며 "요즘은 같이 산다고 해서 다 불편한 것도 아니다. 각자 생활 잘 지키고, 저녁엔 얼굴 보며 하루 어땠는지도 나눈다. 결혼 전까진 집에서 돈 모으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정부나 사회가 청년들의 결혼율을 높이기 위해 '캥거루족=미성숙'이라는 프레임을 일부러 씌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일부 청년층은 "독립하지 않은 상태를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시선이 결국 결혼과 출산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진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성숙 프레임'에 갇힌 캥거루족, 콘텐츠에서도 낙인
이 같은 논란은 대중 콘텐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278만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이 지난 4월 공개한 '신도시 가족 싸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에피소드에서 30대 캥거루족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을 풍자적으로 다뤘다.
극 중 '서준 맘'으로 등장한 류인나(박세미) 씨는 "30대가 돼서도 부모님 집에 사는 게 무슨 이유냐"며 "돈이라도 갖다주면 말을 안 한다"고 남동생을 지적했다.
이에 동생 역할을 맡은 류인수(남현승)는 "엄마는 괜찮다는데 왜 누나가 뭐라고 하냐. 엄마가 불편하면 엄마가 말했겠지"라고 반박하며 "내가 일하는 곳 중에 그나마 괜찮은 데도 월세가 80만원이다. 내가 버는 건 130만원인데 월세 80, 공과금 10, 교통비 10, 통신비 10 쓰면 20만 원 남는다. 밥은 안 먹냐"며 현실적인 비용 부담을 언성 높여 토로했다.
같은달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도 "'캥거루족' 혹은 '쉬었음’' 상태의 청년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예고 영상을 공개하고, 부모와 함께 사는 미취업 청년들의 삶을 조명하겠다고 밝히자 시청자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됐다.
영상이 공개되자 누리꾼들은 "캥거루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폭력적이다", "일하면서도 같이 사는 나는 쓰레기인가?", "구직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왔는데 캥거루족이란 말로 현실을 낙인찍자 말아달라", "자극적인 제목으로 시청자를 낚더니, 정작 내용도 편향적이라 10분 만에 껐다"는 등의 반응을 쏟아냈다.
이처럼 콘텐츠 속에서조차 캥거루족은 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문제적 존재로 소비되기 일쑤다. 그러나 그 이면엔 각자의 사정과 현실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난보다 이해, 낙인보다 공감이라는 지적이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