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소설가나 시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독특한 관문이 있다. ‘등단’이다.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 주최 신인상을 받아 프로 작가로 데뷔하는 것을 말한다. 등단 약력이 없으면 문학 제도권인 ‘문단’에 끼기 어렵다. 비등단 작가는 주요 출판사의 문학 브랜드에서 소설을 출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각종 문학상에서도 암묵적으로 배제된다.
이런 보수적인 한국 출판 시장에서 출간하는 소설, 산문마다 최소 수만 부씩 팔리는 ‘비등단 스타 작가’가 있다. 올해로 전업작가 20주년을 맞은 임경선 이야기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괴롭혔던 갑상샘암이 재발해 30대 중반,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칼럼·에세이로 인지도를 쌓은 뒤 소설집을 출간했고, 이후 장편소설 4편과 단편 소설집 2권까지 내리 펴냈다. 사이사이 산문집도 10여 권을 썼다. 매일 출근하던 직장인의 성실함으로 꼬박꼬박 글을 써 내려간 덕이다.
임 작가를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경제신문은 기업이나 금융권 남성이 많이 볼 것 같아서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다. 추천책 리스트도 이들을 타깃으로 내놨다. 자신의 책을 가장 덜 읽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한 전직 마케터 출신다운 ‘독자 파이 키우기’ 전략인 셈이다.
▷올해가 전업작가 20주년입니다.
“2005년 두산매거진(당시 두산 잡지) 마케팅팀 팀장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전엔 부업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죠. 라디오 출연도 종종 했고요. 그렇게 쌓인 이야기를 에세이로, 또 소설로 펴내다가 훌쩍 이만큼 왔네요.”
▷자기계발서 성격의 에세이로 시작해 단편소설, 장편소설까지 확장했습니다.
“저 스스로는 작가 커리어의 진짜 시작을 2012년 낸 일곱 번째 책 <엄마와 연애할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2011년 첫 소설집 <어떤 날 그녀들이>를 내놓은 뒤 쓴 산문이에요. 이전에도 책은 썼지만 직장 생활하다 칼럼, 에세이, 소설로 넘어갔다 보니 소재가 사랑, 연애, 직장 여성 등에 한정된 면이 있었죠. 소설을 한 번 쓰고 나니 글의 폭이 확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 안의 연한 부분이 섬세하게 나올 수 있게 체질적으로 변했달까요.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가며 쓰는 편인데, 이런 방식이 글을 쓰다 고비가 올 때 물꼬를 터주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는 2015년 출간 뒤 종이책만 22만 부 넘게 팔렸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스테디셀러인데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독고다이 자유주의자’의 느낌을 독자들이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엄격하면서도 단정한 태도를 강조하는 ‘범생이 에세이’ 같으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깔아주고 있거든요.”
▷최근작인 장편소설 <다 하지 못한 말>까지 사랑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기혼의 중년 작가가 청춘 남녀의 감정을 섬세한 감각으로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사랑 이야기가 아직도 재미있습니까.
“저는 사랑 이야기가 계속 좋아요. 타고난 것 같아요.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관심이나 용량은 다른 것 같은데, 저는 그게 큰 사람인 거죠. 사랑은 무척 귀한 감정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보다 남을 더 앞세우는 경우는 사랑할 때밖에 없어요. 완전한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놔버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때 유일하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경험을 합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바보가 되죠.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헤매기도 하고요. 사랑이 시키는 미친 짓이죠. 내가 손해 보면 안 되는 게 상식이고 현실인 세상에 살면서, 자발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 저는 이게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상처받지 않을 결정만 내리는 인생은 재미없지 않나요?”
▷책은 언제, 어떻게 읽는 편입니까.
“아침부터 이른 오후까지 원고 집필을 하기 때문에 독서는 그 이후에 합니다. 보통 자기 전 한두 시간. 외출할 때도 한 권씩 가지고 다닙니다.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읽을 땐 낮 시간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즐거움을 위한 책은 늘 밤에 읽죠.”
▷최근 읽은 책 중엔 뭐가 가장 좋았습니까.
“1986년 출간됐다 절판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집 <복도에 앉은 남자>. 제가 뒤라스를 좋아하는 걸 아는 북디자이너가 ‘고대 유물’이라며 빌려준 책이에요. 당시 이 소설이 출간됐다는 게 놀라워요. 파격적이면서 수위가 높기도 하고 ‘데카당스’하달까요. 불과 6년 뒤 마광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외설 소설 집필 혐의로 투옥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뜻밖이죠. ‘뒤라스한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싶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잊지 못할 특별한 독서 경험이 있나요.
“2015년 갑상샘암이 여섯 번째 재발해 수술을 받았어요. 사람이 아무리 회복 탄력성이 좋아도 같은 펀치를 계속 맞으면 기분이 상당히 안 좋거든요. 아이는 어린데 몸은 힘들고, ‘이게 평생 나를 잡는구나’ 싶었죠. 모든 것이 멈춰선 막막한 마음일 때 병실에서 <파이 이야기>를 읽었어요. 사실 저는 동물 나오는 책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읽는데 기묘하더라고요. 절망적이던 제 마음에 확 와닿았어요. 인생은 ‘견딤’의 연속인 것 같은데, 그때가 제겐 견디는 시기였거든요. 파이도 그 시간을 견뎌낸 거잖아요. 무엇보다 소설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동물 나오는 책이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어요.”
▷책의 어떤 점이 좋습니까.
“오감이 열려 있는 상태이면서 ‘읽기’라는 한 가지 감각만 필요로 하는 게 좋습니다. 자발적으로 내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게 중요해요. 책은 외로움이 아닌 양질의 고독을 주는데, 고독이란 귀하고 감미로운 거거든요. 우연히 발견한 책을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없이, 그냥 혼자 너무 즐겁게 읽은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독자가 돼요.”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책도 썼을 정도로 골수팬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에게 받은 영향이 있나요.
“그분이 50년 가까이 꾸준히 책을 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죠. 소설, 산문 등 저서가 160권에 달해요. 제가 30대 중반에 작가가 됐을 때 그분은 50대였고, 지금은 70대예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닮고 싶은 사람이 계속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그분이 앞에 계셔서 저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고 앞만 보고 쓸 수 있어요. 저를 계속 작가로 남아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비등단 작가의 설움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자유로워졌습니까.
“서러움을 느낄 나이는 지난 것 같아요. 제 경우 좀 배부른 소리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잊지 못할 기억은 있지요. 첫 소설집을 냈을 땐 황당하게도 출판계 일각에서 대필이란 소문도 돌았어요. ‘쟤는 뭔데 소설을 써?’ 이런 거겠죠. 등단 제도를 인정하지 않거나 없애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내가 속하지 않는다 해서 부정하거나 불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영미권처럼 출판 에이전트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선 그래도 운용 가능한 시스템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년 전업작가로 생존했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했습니다. 소회가 궁금합니다.
“저술업은 하면 할수록, 매번 새 책을 쓸 때마다 막막한 느낌이 듭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잘돼도 망하고, 안돼도 망해요. 필연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죠. ‘성공’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어요. ‘내가 쓰고 싶은 걸 써냈다’ 정도의 충족감은 종종 얻는데, 그게 최선인 것 같아요.”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