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세계 3대 SF 문학상' 후보 정보라 작가
단편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
필립 K. 딕상 최종후보 뽑혀
전작 '저주토끼' 부커상 이어
전미도서상 후보 오르기도
"인간성은 포용해야할 대상
정의 내리면 차별은 시작돼"
노란 물결 속 로봇이 그려진 배경으로 소설가 정보라(49)가 줌 화면에 나타났다. 이 배경은 미국판 '너의 유토피아(Your Utopia)' 소설 표지로, 정보라 작가는 이 작품으로 최근 한국인 최초로 필립 K. 딕상 후보 6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포항에 사는 정보라 작가를 지난 14일 줌으로 만났다. 권위 있는 SF 문학상 후보에 오른 소감을 묻자 "정말 뜻밖이었고 너무 기쁘다"며 "(러시아·동유럽 문학을 전공한) 저는 뼛속까지 문과이기 때문에 이따금 SF소설에 자신이 없기도 한데 더 자신감을 갖고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최종 후보 전문 작가'라고 칭했다. 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로 2022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같은 작품으로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는 "최종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최종 후보에 오르면 시상식 전날 열리는 낭독회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문학가와 교류하다 보면 이곳이 '문학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벌써 기대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편소설 위주로 인정받는 세계 문학상에서 그는 단편소설로 연달아 후보에 오르며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그는 "필립 K. 딕상도 장편소설 위주로 상을 주는 곳인데, 단편소설로 이뤄진 제 소설집이 후보에 올라서 깜짝 놀랐다"며 "영미권 독자를 만나는 행사에 가보면 독자들이 '나는 원래 단편소설을 읽지 않는데 너의 단편은 재밌다'고 종종 말씀해준다. 영미권 독자들이 유독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보라는 계속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밝혔다. 그는 "제가 참을성이 없고 구조를 잘 못 짜서 단편을 주로 쓴다"고 겸손하게 말하고는 "사람은 잘하는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 제가 잘하는 단편 위주로 쓰면서 장편 쓸거리가 있으면 쓰겠다"고 말했다.
후보작에 오른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를 쓸 때 어떤 점에 주력했을까. 그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썼다. 인간이란, 자아란, 상상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생각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는가를 계속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간성이 무엇이냐고 되묻자 "인간이란 정의할 수 없다. 정의해선 안 된다. 정의하기 시작하면 차별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홀로코스트로 가는 것은 몇 단계 안 된다"며 "이것도 인간성이고, 저것도 인간성이다. 이렇게 계속 포용해 나가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는 답을 들려줬다.
이 소설집은 2021년 출간된 '그녀를 만나다'의 개정판으로 '영생불사연구소' '너의 유토피아' '여행의 끝' '아주 보통의 결혼' 등 8편의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 '너의 유토피아'는 전염병으로 인류가 떠나버린 황량한 행성에서 고장 난 휴머노이드를 태우고 배회하는 스마트카의 이야기를 담는다. 인간을 꼭 닮은 의료용 휴머노이드 314는 이따금 "너의 유토피아는?"이라고 물으며 망가진 세계를 헤맨다.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SF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란 제목의 강의를 하면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수업의 주제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였는데 제일 좋은 소재가 로봇이었다.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사람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은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외모가 사람처럼 생긴 로봇은 절대 만들 수 없다고 얘기하더라. 사람이 늙어가고 피부에 결점이 있고, 감정에 따라 혈색이 변하고, 미세한 근육에 떨림이 있고, 얼굴이 완전한 대칭이 아닌 점 등 이러한 불완전함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SF소설은 '덕후' 기질이 다분한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다. SF소설이 처음인 독자들을 위한 조언이 있는지 궁금했다. "우리나라엔 뛰어난 SF 작가가 정말 많다. 김초엽, 천선란 작가는 따뜻하고 다정한 SF소설을 써서 첫 SF소설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배명훈 작가는 엉뚱한 상상력이 넘치고, 김보영 작가는 철학적이고, 홍지운 작가는 코믹하다. 서점의 SF 섹션 서가에 가서 독자의 취향대로 골라 읽으면 된다."
그러면서 자신을 '귀신 이야기를 쓰는 SF 작가'라고 정의했다. 차기작도 귀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활동가, 번역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는 "요즘 데모할 거리가 많다"며 "최근에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앞에서 열린 고공 농성 1주년 기념 집회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문학 작품 번역도 병행하고 있다.
'저주토끼'에 이어 '너의 유토피아' 영어 번역도 안톤 허가 맡았다. 그는 "번역은 고유한 영역이므로 간섭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다.
필립 K. 딕상은 전년도 미국에서 페이퍼백으로 출간된 뛰어난 SF 작품에 매년 수여되며, 미국 SF 작가인 필립 K. 딕 트러스트의 지원으로 진행된다. 최우수상 선정 등 최종 결과는 오는 4월 발표된다.
[박윤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