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에나 있다 [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4 days ago 2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봄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를 해야 할 때 이 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은 찜찜함과 거북함이 밀려든다.

소셜미디어에 친구가 올린 사진을 보니 경주는 찬란한 봄이었다. 크고 둥근 능 주변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공기는 따스해 보였다. ‘나에게도 경주에 갈 이유가 있는데….’ 경주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스테이 ‘히어리’가 있고 우리 부부는 그곳을 너무도 좋아한다. 사장님 부부가 단정하고 소박하게 일군 집과 뜰에서 꽃구경을 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함께 산책을 하거나 근처의 산으로 나들이를 다녀 오면 하루가 작은 평화로 꽉 찬다. 지난해 사장님이 김장김치를 보내 주시며 ‘봄에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고 했는데 휴, 이번 봄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다.

봄이 되면 전남 구례도 생각난다. 이곳에는 ‘산에 사네’란 숙소가 있다. 우리가 ‘지리산 팅커벨’이라고 부르는 사장님이 계신 곳. 활기차고 생글생글한 모습으로 농사를 짓고, 화단을 가꾸고, 저녁에는 차를 휭 몰아 요가를 하러 나가는 그. 아침 밥상에는 취나물, 엄나물, 두릅, 참나물, 명이, 씀바귀, 달래를 포함해 10여 가지가 훌쩍 넘는 나물이 올라오는데 하나같이 향기롭고 맛있어서 서울의 요리 연구가들도 제법 찾아온다. 종일 잰걸음을 할 만큼 바쁘면서도 화병에 꽃 꽂는 걸 빠뜨리지 않고 툇마루도 늘 반들반들 닦아 놓는 사장님의 시간을 보고 있으면 삶의 건강함이 내게도 훌쩍 들어오는 것 같다.

지난주에는 충북 제천에서 친구들이 왔다. 역시 우리 부부가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들을 맞이하느라 이불도 새로 샀다. 저녁에 도착한 그들에게 요리 수업에서 배운 김치말이보쌈을 해 주고 다음 날 아침에는 느긋하게 일어나 동네 산책을 했다. 첫 행선지는 아파트 앞 작은 공원. 5분이면 다 둘러볼 만큼 작은 쉼터인데 그곳에도 간질간질 봄기운이 가득했다. 벛꽃은 금방이라도 망울을 터트릴 것 같았고 나뭇가지에는 연둣빛 물이 곱게도 올라와 있었다. 여기도 봄, 저기도 봄. 작은 공원에도 봄은 꽉 찬 밀도로 가득했다.

공원에서 내려온 후에는 정동길로 코스를 잡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뜰과 대로변을 지나 정동길로 들어가 덕수궁 돌담길로 빠져나오는 길은 새록새록 아름다웠다. 가로수로 심은 키 큰 진달래, 이화여고의 그윽한 아름다움, 정겨운 돌담길까지. 돌담길 앞에서는 한 청년이 바이올린으로 영화 ‘타이타닉’과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곡을 들려주었다. 봄기운에 심신이 깨어나자 계속 더 걷고 싶었고 우리는 시청 앞에서 마을버스 종로09번을 타고 서촌으로 넘어가 박노수미술관까지 보고 왔다. 벚꽃은 아직이지만 벚꽃을 꼭 닮은 앵두꽃이 환하게도 피어 있었다. 보들보들 작고 노란 산수유도.

경주도 못 가고 구례도 못 간다며 못마땅하고 서운한 마음이었는데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봄은 저 멀리 남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꽃은 어디에나 있었다. 서울은 이번 주말이 벚꽃의 절정이란다. 이 환하고 무해한 아름다움이 도처에 가득한 시간은 또 소나기처럼 짧을 것이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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