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핵폭탄급 관세 정책을 발표하면서 “친구가 적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대미 무역흑자를 보는 국가들은 미국을 ‘약탈하고 후려치고 등쳐먹고 뜯어먹고 호구 삼는’ 나라다. 연간 1조2000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악화시킨 주범 국가들이다. 이런 인식은 트럼프 대통령의 뼛속까지 각인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상용 수사라고 하기엔 지독하게 일관돼 있고, 반복해서 튀어나온다. 좋은 물건들을 그저 열심히 잘 만들어서 팔았을 뿐인 수출국들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다.
‘원스톱 쇼핑’ 맞춘 최적 조합 찾아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콕 찍어 말한 게 여러 차례였지만,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호주는 미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 나라이자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안보 파트너임에도 관세를 피해가지 못했다.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특별 제작한 황금 투구까지 들고 갔지만 우리보다 단 1%포인트 적은 24% 관세를 맞았다. 대만, 인도 등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협상을 요청하는 나라들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내게 아부를 떨고(kissing my ass) 있다”고 조롱하듯 말했다. 미국이야말로 ‘적보다 나쁜 친구’로 돌변할 판이다.가뜩이나 어려운 상대가 불신과 편견까지 안고 협상장에 나오니 타협점을 찾는 과정은 전례 없이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원스톱 쇼핑’은 미국이 그리는 협상의 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도움이 될 방향점이다. 한국의 경우 조선업 협력,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알래스카 가스관 프로젝트 참여 등에 더해 군사안보 분야까지 패키지로 엮어 총괄적으로 주고받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때 집요하게 요구했던 게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었다. 글로벌 관세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인 2019년 방위비 분담금을 5배 늘리라고 압박했다. 지난해 대선 유세 기간에는 10배로 높여 불러놓은 상태다. 이번에는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눈치이니 어차피 피해갈 방법도 없다. 1기 때에는 연계된 카드가 주한미군 감축 같은 안보 분야에 국한됐지만 이번에는 경제, 산업 분야까지 넓혀져 있다.
방위비까지 패키지로 묶는 대응 필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던 초기 “피로 맺어진 동맹국의 전우를 용병으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비판이 미국 내 지한파 학자와 의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북한의 핵 위협 사정권에 놓인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 또한 증액 압박에 맞서왔다. 다만 더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돼 있다. 그 성장의 바탕에 미국이 제공해준 안보가 있었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방위비 같은 안보 이슈를 먼저 꺼내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시적인 유예기간이 끝나자마자 되살아날 25%의 관세 폭탄 앞에서는 안일한 접근이다. 분야별로 가치가 다른 협상 카드들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담판 과정에서 상대를 설득할 최적의 조합을 찾으려면 우리가 선제적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다. 큰 틀에서 통 크게 거래의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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