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 발레 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 별세…향년 9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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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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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발레 안무가(choreographer)가 우리 곁을 떠났다.”(영국 일간 가디언)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발레 마스터’로 불리며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을 이끌었던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19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별세했다. 향년 98세.

1927년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리고로비치는 레닌그라드 발레학교를 졸업한 뒤 무용수로서 발레 인생을 시작했다. 1946년 키로프아카데미 오페라 발레 극장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해 약 15년간 발레리노로 무대에 섰다. 1961년 34세의 나이에 이 극장 안무가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안무가의 길을 걸었다.

고인이 ‘스타 안무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건 1964년 볼쇼이극장 수석 안무가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볼쇼이극장은 산하에 발레단과 오페라단, 관현악단 등을 둔 세계적 예술단체. 그리고로비치는 30년 넘게 수석 안무가를 맡으며 ‘호두까기 인형’(1966년), ‘이반 뇌제’(1975년), ‘앙가라’(1976년) 등 숱한 명작을 선사했다.

특히 그의 ‘호두까기 인형’은 볼쇼이극장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작품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당시 세계 평단은 “춤 동작만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극찬을 보냈다.

1988년부터는 예술감독까지 겸하며 볼쇼이극장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지만, 1995년 경영진과의 불화로 한때 극장을 떠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무용수들이 극장 200년 사상 처음으로 파업까지 벌였다. 이후 그리고로비치는 자신의 이름을 건 극장 예술감독을 지내다가, 2008년 다시 볼쇼이로 돌아왔다. 최근까지도 안무가 겸 발레 연출가로 활동했다. 2017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최고 권위의 ‘러시아 국가상(Russian Federation National Award)’을 수여하는 등 러시아 안팎에서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고인은 한국 발레계와도 인연이 깊다. 국립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호두까기 인형’(2000년)과 ‘백조의 호수’(2001년), ‘스파르타쿠스’(2001년) 등은 그리고로비치가 직접 국립발레단을 위해 안무를 손봤던 작품들. 연출에도 깊게 관여했다. 김선희 한예종 무용원 교수는 “국립발레단이 수준 높은 레퍼토리를 쌓는데 엄청난 공을 세웠다”며 “세기의 안무가로서 한국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안겨줬다”고 평가했다.그리고로비치는 당시 국립발레단을 정성껏 도우면서도 저작권료조차 받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은 “세계적인 안무가들은 자기 작품이 공연돼도 조수만 보내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고인은 공연장 근처 집을 구해 3개월간 머물며 직접 가르치는 열정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예술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가족같이 대하는 따뜻한 이였다는 게 국내 발레계의 평가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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