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맞춰 다채롭게 색깔을 바꾸는 응원봉,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떼창과 환호,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노는 1만8000명의 관객. 여느 K팝 그룹의 콘서트와 다를 바 없는 장관을 연출해낸 건 데뷔 57주년을 맞은 가수 조용필이었다. 2시간 반 동안 쉴 틈 없이 노래가 이어졌다. '75세'라는 나이는 무대 위 '가왕(歌王)'의 열정 앞에서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조용필은 지난 6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조용필-이 순간을 영원히' 콘서트를 개최하고 무대에 올랐다. 해당 공연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KBS가 준비한 대기획으로, 전석 무료로 진행됐다. 중앙 제어 시스템을 통해 노래에 맞춰 색깔이 바뀌는 응원봉도 무상 제공했다.
노래의 왕, 가수 중 최고의 왕이라는 뜻의 '가왕' 수식어의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국내 최초 단일 앨범 밀리언셀러, 국내 최초 누적 음반 판매량 1000만장 돌파, 한국 가수 최초 일본 NHK홀 및 미국 카네기홀 공연 등 숱한 '최초'의 기록이 모두 '가왕' 조용필의 것이다.
1980년대 온갖 가수상을 휩쓸었던 그는 반박 불가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날 현장에서는 과거 조용필이 가수상 수상자로 본인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수년 동안 적수 없이 이어졌던 조용필의 인기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영상에서 "기도하는~"이라는 음성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는 환호가 쏟아졌다.
조용필과 30년 넘게 호흡을 맞춰온 밴드 위대한 탄생의 시원한 연주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터지자 관객들은 열광했다. 방송 녹화가 같이 진행된 탓에 입장 마감이 일찌감치 이뤄지고, 공연 시작도 30분가량 지연되면서 관객들은 1시간 정도 자리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조용필의 등장과 함께 지루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정갈한 하얀 의상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어깨에는 새빨간 일렉트로닉 기타를 둘러멘 조용필의 모습은 단숨에 관객들을 압도했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미지의 세계'를 시작으로 '못찾겠다 꾀꼬리', '자존심', '그대여'까지 내리 4곡을 시원하게 뽑아내며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그가 왜 '가왕'이라 불리는지 단번에 납득되는 오프닝이었다. '못찾겠다 꾀꼬리'를 부를 때는 "얘들아~"라고 힘차게 외쳤고, '그대여' 무대에서는 밴드 멤버와 어깨를 맞대고 화려한 손놀림으로 기타줄을 튕기기도 했다. 기세 넘치게 울려 퍼지는 가창은 기본이었다.
오프닝을 마친 조용필은 "안녕하시냐. 오래 기다리셨다. 이렇게 뜨겁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제 공연에 자주 오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오랜만에 절 보는 분들은 또 다를 것 같다. 많이 변하지 않았냐"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어 "KBS에 출연하는 건 1997년 이후 28년만"이라면서 "TV라니까 떨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조용필은 "위대한 탄생을 소개한 지도 33년이 됐다. 지금까지 노래할 수 있었던 건 여러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계속 노래할 거다. 하다가 정 안 되면 또 2, 3년 쉬었다가 나오고, 그래도 안 되면 4, 5년 쉬다 나오면 되는 것"이라고 말해 박수받았다.
약 2시간 반 동안 조용필은 무려 28곡을 소화했다. 멘트를 간소화해 무대에 집중했다. 일반적인 콘서트의 흐름보다도 더 타이트한 전개였지만, 가왕의 얼굴에서는 단 한 순간도 지친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추억 속의 재회', '창밖의 여자', '촛불', '어제, 오늘 그리고'를 부를 땐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묵직한 가사에 관객들도 숨을 죽인 채로 귀를 기울였다. '단발머리' 무대에서는 복고풍 의상의 댄서들이 나와 옛 감성에 푹 젖었고, '고추잠자리'를 부를 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조용필의 모습이 스크린에 띄워져 객석이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과거의 조용필, 그리고 1만8000명의 함성을 듣는 현재의 조용필이 어우러져 그의 음악이 현재진행형의 역사임이 가슴에 와닿았다.
실제로 가왕의 행보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꿈', '바람의 노래' 등의 과거 히트곡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꾸준히 소비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에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사운드, 청춘을 위로하는 메시지 등이 담긴 신보를 발표했다.
그 덕에 현장에는 부모·자녀가 동반한 관객들이 많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나란히 공연장으로 향하는 딸, 아빠와 함께 응원봉을 흔드는 아들이 눈에 띄었다. 부모를 위해 따라나선 경우가 아닌, 조용필의 음악으로 하나 되어 소통하는 장이었다.
1980년대 격변의 시대에 대중문화를 꽃피우고 시대를 함께 걸어온 음악의 힘은 위대했다. 촉촉해진 눈가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를 읊조린 어르신들에 이어 청년 세대들이 '바운스', '그래도 돼', '찰나'에 몸을 흔들었다. 백발의 어르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봉을 힘차게 흔들었고, 부모와 자식들은 화면에 얼굴이 잡히자 손하트를 하거나 볼을 비비며 사랑 표현을 했다.
'모나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운스'에 이어 앙코르로 '여행을 떠나요' 무대가 펼쳐지며 공연은 마무리됐다. 히트곡 중의 히트곡인 '여행을 떠나요'를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관객이 따라불렀다. 객석 위로 제공된 대형 풍선을 신나게 튕기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감정은 뜨거운 화합이었다.
콘서트 제목은 '이 순간을 영원히'다. 조용필은 "이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조용필-이 순간을 영원히'는 추석 연휴인 오는 10월 6일 KBS 2TV에서 방송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