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화훼이 말살작전’에도
공격적인 늑대문화 내세워
오히려 더 빠르게 사세확장
24시간 근무체제로 전력투구
매출 20% 연구개발에 투입
결국 거대한 ‘AI제국’ 구축
엔비디아 라이벌로 급부상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을 때 미국인들은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대충격에 휩싸였다.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던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우리보다 우월한 기술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은 이른바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기술 선진국이 후발주자에게 뒤통수를 맞는 순간)’였다.
올해 1월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렴한 비용으로 챗GPT에 버금가는 언어모델을 내놓자 미국은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실리콘밸리 혁신과 기술력을 통한 AI패권을 자신했는데, 그 믿음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제2의 스푸트니크 순간’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의 대중 AI 칩 수출규제가 전개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충격은 더 컸다.
딥시크 쇼크 뒤에는 오랫동안 미국에 미운털이 박혀 고난을 겪었던 한 기업이 있다. 바로 화웨이다. 딥시크를 구동하는 칩을 화웨이가 제작·공급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987년 중국 선전의 소형 전화교환기 업체로 시작한 화웨이가 어떻게 통신장비와 스마트폰을 넘어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AI 칩 생산자로서 엔비디아와 직접 경쟁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는가.
화웨이 쇼크, 에바 더우,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펴냄, 3만2000원
신간 ‘화웨이 쇼크’는 세계를 뒤흔든 미스터리한 기업인 화웨이를 에바 더우 워싱턴포스트 테크 전문기자가 촘촘히 파헤친다.
책의 시작은 창업자 런정페이의 장녀이자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멍완저우가 2018년 12월 1일 캐나다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미국의 대이란 제재 위반 혐의로 현지 경찰에 긴급 체포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멍완저우가 중국에 돌아온 건 2021년 9월이었다. 거의 3년 가까이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가택연금을 당했던 것이다.
그사이 미국 상무부는 도널드 트럼프 1기 시절인 2020년 5월 화웨이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강화했다. 당시 화웨이는 퀄컴과 인텔의 칩,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등에 의존하고 있었다.
멍의 가택연금은 중국 사람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차에 ‘화웨이 파이팅, 중국 파이팅’이라고 적은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으며, 화웨이 휴대폰을 사재기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화웨이 캠퍼스의 커피숍 종이컵에는 안쓰러운 발레리나의 맨발과 전자발찌를 찬 멍완저우의 발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멍완저우의 발과 멍든 발레리나의 발은 모두 성공을 향한 고난의 역경을 연상케 한다”는 문구도 있었다. 돌아온 멍완저우는 미국의 핍박을 받은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중국인들의 자부심이 됐다.
2023년 9월 화웨이는 반격에 나섰다. 미국의 첨단 제재를 정면 돌파하며, 중국 내에서 만든 5G 칩으로 구동되는 ‘메이트60 프로’ 스마트폰을 출시한 것이다. 분해할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휴대폰을 샀다. 이 결과 중국 반도체 산업이 고사하기는커녕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화웨이의 칩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의 존재에 있다. 극도로 보안이 유지되는 이 회사는 화웨이의 희망이다.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테레사 허 하이실리콘 사장은 “우리가 만든 모든 스페어타이어가 하룻밤 사이에 ‘메인’ 타이어가 됐다”며 “우리가 수년간 흘려온 피와 땀과 눈물을 하룻밤 사이에 현금으로 바꿔,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서구 국가들의 견제와 배척에도 화웨이는 여전히 5G 장비 판매량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가격 경쟁력으로 신흥시장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AI 칩 분야에서도 엔비디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업으로 부상했다는 평가다.
화웨이의 성공 비결은 일찌감치 AI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세계 유수 대학과 연구개발에 매진한 결과였다. 1998년 화웨이는 103개 조항으로 된 기본법을 채택하며, 기업 목표를 ‘주주 이익’이 아닌 ‘통신장비 분야 세계 선도’로 정했다. 수익의 대부분을 전략적 투자에 재투자하며, 수익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2024년 화웨이는 연구개발비에 매출의 20%인 36조원을 쏟아부었다.
화웨이의 지배구조도 독특하다. 서류상 주주는 1% 지분을 보유한 런정페이와 나머지를 보유한 노조뿐이다. 광둥성 선전 정부는 경영권 분쟁을 없애기 위해 모든 종업원 주주를 ‘노조’에 일괄 등록시킨 후, 법적으로 단일 주주로 간주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창업 초기 ‘매트리스 문화’와 ‘늑대 문화’도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밤샘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을 위해 사무실 책상 옆에 매트를 배치했다. 영업팀에는 무리를 지어 공격하는 늑대 문화를 강조했다. “한 마리가 쓰러지면 다른 한 마리가 그 틈으로 뛰어듭니다. 늑대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1995년 주6일 근무를 주5일 근무로 공식 전환했지만, 화웨이 직원들은 24시간 근무 방침을 고수하며 고객에 대한 집념을 보여줬다. 호텔, 공항, 심지어 고객 집 앞까지 찾아가는 끈질긴 영업 전략으로 평판을 쌓아갔다.
이처럼 민관산학이 똘똘 뭉쳐 혁신 생태계 조성에 나서고 있는 중국의 상황을 보면 한국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냐는 물음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제 한국만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사라졌다. 안일한 대응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스푸트니크 순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