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울린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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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에 본디 거문고 소리가 있다면,상자 속에 넣어 둘 때는 어찌 울지 않는가.소리가 손가락 끝에 있다면,어찌 그대의 손가락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는가.(若言琴上有琴聲, 放在匣中何不鳴. 若言聲在指頭上, 何不於君指上聽.)―‘거문고에 관한 시(금시·琴詩)’ 소식(蘇軾·1037∼1101)제목만 보면 이 시에서는 달빛 아래 거문고 소리가 흐르고 선비의 마음이 맑아지는 장면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소리를 묘사하는 대신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소리가 거문고에 있다면 왜 상자 속의 거문고는 울지 않는가.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면 왜 손끝에서는 음악이 들리지 않는가. 거문고만으로도 안 되고, 손가락만으로도 안 된다. 좋은 악기와 좋은 손길, 거기에 마음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음악이 태어난다. 좋은 조건만으로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의욕만 앞선다고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재능은 기회를 만나야 하고 기회는 준비된 사람을 만나야 한다. 흔히 당시는 서정을, 송시는 이치를 즐겨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송시는 때로 짧은 논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도 그런 예다. 시적 향기는 짙지 않지만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깨달음이 있다. 불가의 게송(偈頌)과도 닮았다. 살다 보면 우리는 자주 탓할 대상을 찾는다. 악기가 나쁘다거나 손가락이 둔하다거나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음악이든 삶이든 어느 한쪽의 공로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다. 어려운 철학을 책상 위에 두지 않고 거문고 상자와 손가락 끝으로 끌어내린 성찰이 흥미롭다. 삶도 결국, 제 소리를 찾아가는 조율의 예술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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