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이율곡… 두 여인의 못다 핀 사랑

1 week ago 7

[한시를 영화로 읊다] 〈107〉 대신 쓴 사랑 노래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여성의 사연을 다룬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1995년)에선 이츠키라는 이름을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시대 신흠(申欽·1566∼1628)의 다음 시에서도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유지(柳枝)라는 이름을 가진 두 여인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겹친다.

이 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사랑을 받았던 황해도 황주의 기생 유지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율곡이 1574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을 때 만났다고 하는데, 율곡은 그녀의 재주와 용모를 어여삐 여겼지만 성적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율곡이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583년까지 이어졌다. 율곡은 자신을 찾아온 유지에게 ‘유지사(柳枝詞)’를 써주었는데, 유지는 사모하던 율곡이 세상을 뜨자 작품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 황주를 지나는 문인들에게 시를 요청하곤 했다. 시인도 1609년 명나라로 사신 가는 길에 황주를 지나다가 지어준 것이다. 시인이 유지의 애틋한 사연을 대신 노래한 셈이다.

영화 ‘러브 레터’에서 이츠키는 동명이인인 남자 이츠키가 도서 대출 카드 뒤에 그려 놓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영화 ‘러브 레터’에서 이츠키는 동명이인인 남자 이츠키가 도서 대출 카드 뒤에 그려 놓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영화에선 히로키가 죽은 연인인 줄 알고 동명이인인 이츠키에게 잘못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죽은 이츠키와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의 옛사랑이 윤곽을 드러낸다. 잘못 보낸 러브 레터가 또 다른 사랑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시에서는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던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구절을 가져와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조명했다. 이상은을 연모했지만 사랑이 이뤄지지 못한 여인의 이름 역시 유지(柳枝)였기 때문이다. 첫 구절은 이상은 시의 “봄 누에는 죽어서야 실이 다하고, 촛불은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겨우 마른다지요(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乾).”(‘無題’)에서 온 것이고, 세 번째 구절의 정향 노래란 이상은이 ‘유지’에 대해 읊은 연작시(‘柳枝’ 5수)를 가리킨다. 연작시의 두 번째 수에서 이상은은 원치 않던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유지의 안타까운 처지를, 맺혀 펼쳐지지 못하는 정향나무의 꽃망울에 빗댄 바 있다. 시에선 이를 통해 율곡이 남긴 ‘유지사’를 환기시켰다. 이상은이 낙양 상인의 딸 유지와 ‘종류가 달라(不同類)’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한탄했던 것처럼, 율곡과 기생 유지의 사랑도 신분상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시인은 유지의 슬픔을 타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시를 마무리했다.

영화에서 여자 이츠키가 자신을 향한 남자 이츠키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은 전학을 가며 반납을 부탁했던 책의 도서 대출 카드 뒤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유지가 시첩(詩帖)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던 것도 자신에 대한 율곡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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