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추계” 대통령 고집 끝에 증원 원점
의료 공백-신뢰 붕괴-대입 혼란 등 상흔만
이해관계 얽힌 문제일수록 설득, 타협이 길
의대 증원 정책이 1년 2개월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번 사태는 실제 사회적 환경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거대한 ‘사회실험’이 됐다. 실험 결과 의대 증원이 소수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여론이 180도 뒤바뀌었다. 정부가 왜 그렇게 막무가내였나 국민들은 현재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가 말한 ‘의료 수요’에는 왜곡이 있었다. 의학적 필요와 지불 능력에 바탕한 수요를 오인한 채 수요 폭증만을 외쳤다. 이미 위태로운 건강보험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공급 확대 처방은 지속 가능성을 잠식한다. 숫자가 늘어도 필수·지역의료가 강화된다는 보장도 없다. 또 의료 인력 추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정책 방향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의료 체계를 지향하는지, 어떤 형태의 의료 서비스를 우선시하는지, 의료비 부담을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따라 적정 인력 규모는 크게 달라진다.
그럼에도 ‘과학적 추계’라는 표현을 쓰며 밀어붙인 정책은 되레 과학의 권위를 훼손했다. 결국 ‘대통령 말씀이 곧 과학이었다’는 조소만 남은 채 득(得)도 없이 실(失)만 남겼다.이 같은 밀어붙이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뢰의 붕괴다. 이해당사자를 배제한 일방적인 정책 추진은 초기에는 강력한 추진력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의료 공급자와 관리자, 국민과 의료인 간의 신뢰만 무너뜨렸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직역 간,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됐다. 이렇게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책적 변화도 성공적으로 이루기 어렵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도 발생했다. 정원 확대 방침을 믿고 시설과 인력을 확충했던 사립대 의대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2년 연속 대입에 큰 변화가 생기며 수험생과 학부모는 혼란에 빠졌다. 더 심각한 것은 의료 공백으로 인한 국민의 피해다. 의정 갈등 속에서 상급종합병원의 수많은 수술이 연기됐고, 이로 인한 환자들의 불안과 의료진의 소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정책 결정 과정의 불완전함이 초래한 결과다.
더욱이 젊은 의료인들이 경험한 상처와 분노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요구안 중 일부는 현실적으로 즉각 실현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정책 추진의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정당한 문제 제기다. 이들이 요구하는 의료 인력 수급 추계를 위한 제도적 대안과 투명한 운영, 수련 환경 개선,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 방안 등은 향후 정책 방향에서 반드시 고려돼야 할 사항이다. 의대 증원 정책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완벽한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학자 겸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처럼, 충분히 복잡한 체계 내에서는 모든 이해관계와 목표를 충족시키는 완벽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제학에서 케네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도 같은 맥락에서 모든 개인의 선호를 동시에 충족하는 사회적 의사결정 규칙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따라서 의료정책과 같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는 ‘대통령 의지’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거두기 어렵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정책 추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뿐더러 이 같은 밀어붙이기에 제어장치마저 없다면 정권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6월 4일 들어설 차기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정부의 리더십은 일방적인 밀어붙이기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발휘돼야 한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실현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의대 증원 정책의 원점 회귀는 실패가 아닌, 더 나은 정책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돼야 한다. 차기 정부는 쓰디쓴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 수립의 새 모델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재훈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