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초저리 대출만 기다린다…150조 펀드가 부른 '돈맥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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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신한 하나 우리 농협 등 5대 금융지주가 이달 중순까지 국민성장펀드에 투입한 금액이 2조원가량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10조원(5년간 50조원)을 공급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고려하면 기대 이하의 속도다. 국민성장펀드 실무를 담당하는 산업은행에서 병목 현상이 생겨 투자에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6일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5대 금융지주의 국민성장펀드 지원액은 지난 14일 기준 2조450억원(약정액 기준)을 기록했다. 5대 금융지주가 올해 지원하기로 한 목표액(10조원)의 20.5%다. 국민성장펀드는 첨단전략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조성하는 150조원 규모 정책 펀드다.

투자 더딘 150조 국민성장펀드…자본시장 '돈맥경화' 부추겨
1분기 경영권 거래액 반토막…유동성 풀리면 팔려고 미적

정부가 추진 중인 국민성장펀드가 자본시장의 ‘블랙홀’로 떠올랐다. 첨단전략산업에 5년간 150조원을 지원하는 매머드급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자본시장 전체가 국민성장펀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모양새다. 시장의 관심이 국민성장펀드에 쏠리면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인수합병(M&A), 기업 자금 조달 등이 국민성장펀드 일정에 맞춰 줄줄이 늦춰지고 반도체·인공지능 등 일부 산업엔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단독] 초저리 대출만 기다린다…150조 펀드가 부른 '돈맥경화'

◇자체 딜 포기하는 금융지주

국민성장펀드는 글로벌 첨단전략산업 기술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민관 합동으로 대규모 자금을 조성하는 정책펀드다. 공공(첨단전략산업기금)과 민간이 각각 5년간 75조원씩 지원해 총 150조원을 투입한다. 올초부터 본격 가동된 국민성장펀드는 그동안 신안우이 해상풍력, 삼성전자 평택 5공장(P5), 이수스페셜티케미컬 전고체 배터리 소재 공장, 네이버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 등에 약 7조원을 투입했다.

국민성장펀드 투자 실적에 가장 예민한 곳은 5대 금융지주다. 금융지주별로 연간 2조원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기업금융, 투자금융 부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각 금융지주가 자체적으로 발굴한 기업대출 등을 스스로 소화하기보다 국민성장펀드로 돌릴 정도다.

문제는 더딘 투자 속도다. 5대 금융지주가 지난 14일까지 국민성장펀드에 투입한 금액은 총 2조450억원으로 올해 목표치의 20.5%에 그쳤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정부의 핵심 과제인 생산적 금융에 발맞추기 위해 국민성장펀드 투자 목표는 무조건 채워야 한다는 분위기”라며 “업계 의지와 달리 실적이 저조한 것은 산은에 과부하가 걸려 투자 집행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성장펀드 투자가 늦어질수록 자본시장 전체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과 증권사가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딜도 국민성장펀드 몫으로 넘기는 상황”이라며 “국민성장펀드 투자 속도가 늦어지면 시장 전반에 자금이 제때 풀리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저리 대출 기다리는 기업들

기업이 신규 성장동력을 찾거나 불필요한 사업 부문을 정리하기 위한 M&A 시장도 반토막이 됐다.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 마켓인사이트가 한경에이셀과 함께 집계한 2026년 1분기 리그테이블(발표 기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62건, 9조4763억원 규모의 기업 경영권 거래가 이뤄졌다. 81건, 21조1936억원이던 작년 1분기 대비 거래 건수는 23%, 거래 규모는 55% 급감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 유동성이 풀린 뒤 기업가치를 더 높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매각 일정을 늦추는 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사모펀드(PEF), 벤처캐피털(VC)업계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관측된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7조4500억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간접투자 자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한 PEF 운용사 대표는 “국민성장펀드 자펀드 운용사에 선정되는 게 최우선 과제”라며 “업계 전반적으로 펀드 자금 모집에 집중하며 신규 투자는 후순위로 미루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기업도 자금 조달 일정을 늦추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초저리 대출을 받는 것이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보다 유리해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2월까지 일반회사채 발행 금액은 12조290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35.9% 급감했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첨단전략산업의 경쟁력은 ‘적기 투자’에 달려 있는 만큼 관계 기관은 국민성장펀드를 신속히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AI·반도체 ‘자금 쏠림’ 심화

일각에선 국민성장펀드가 벤처 시장의 거품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간 자금만으로도 소화가 가능한 AI, 반도체 업종의 우량 기업에 국민성장펀드가 대규모 자금을 집어넣고 있어서다. 지난달 국민성장펀드는 ‘K엔비디아’ 육성 전략의 일환으로 리벨리온에 2500억원을 직접 투자하기로 했다. 리벨리온 기업가치는 3조5000억원으로 평가됐는데, 2024년 말 1조원을 넘긴 것을 감안하면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VC 관계자는 “정책펀드가 들어오면 민간 VC의 투자 기회가 줄어들 뿐 아니라 밸류에이션 거품을 키워 투자 수익률을 떨어뜨린다”고 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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