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우리 세금을 밑도 끝도 없이 빨아들이는, 3년 묵은 저 놈의 전쟁을 확 끝내 버리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오랜 민주당 집권기를 끝내고 대통령이 된 그 후보, 약속대로 휴전 협상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사자인 우방국을 협상에서 배제했다. 어이없는 왕따를 당한 그 우방국, 이건 아니라고 악을 썼지만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뿐. 어째 우크라이나가 연상되는가? 하지만 그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였고 배제된 우방국은 우리였다. 그렇게 6개월 후 체결된 휴전협정서에는 우리를 뺀 미국, 중국, 북한의 서명만 남았다. 그리고 72년 만의 데자뷔는 무엇을 의미할까?
코너에 몰린 한국, 학생을 동원한 휴전 반대 시위로 응전을 시작했다. 이어서 의회의장, 대법원장, 장관이 전원 참가한 ‘북진통일 국민대회’를 열어 미군이 빠져도 국군만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기를 보여준다. 결정타는 일체의 논의도 없이 ‘반공 포로’ 2만700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사건이다.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던 북한군은 남한 출신, 반공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군대로 끌고 갔다. 그래서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 3만5000명이 전쟁이 끝나면 남쪽에 남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포로는 무조건 소속국으로 송환하는 게 오래된 제네바 협정의 원칙, 그걸 정면으로 위반한 ‘미친’ 행동이었다. 북한에 포로로 잡힌 군인이 있는 참전국이 길길이 뛰었다. 처칠은 이승만을 당장 제거하라고 요구했고 그의 무능과 독선에 질린 미국도 그걸 진지하게 검토했다. 총알부터 포탄까지 모든 걸 미국에서 원조받는 상황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그 광인 전략에는 ‘종전 후 안전 보장’이라는 절박함이 깔려 있었다. 결국 미국이 한사코 거부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따냈고 육군 2개 사단, 공군 1개 사단의 한반도 주둔까지 확약받은 후 휴전을 묵인했다. 그리고 그 부대를 휴전선과 서울 사이에 배치해 안전 보장을 극대화했다.
반공을 우선한다는 공화당이지만 단기적 성과에 몰입하는 대통령이 등장할 때마다 주둔‘당한’ 미군을 빼내려고 시도했다. 모처럼 민주당을 꺾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은 1970년 미군 6만 명을 ‘전원’ 철수하겠다고 선언해 모두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후 2만 명을 빼냈다. 공화당인 ‘아버지 부시’는 주둔 비용을 내는 조건으로 7000명만 추가 감축했다. 민주당인 카터도 육군 3000명을 철수했지만 그 대신 최신 공군기를 배치해줬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도 미군 축소와 주둔 비용 인상을 놓고 딜을 시도했다.
트럼프는 오랜 시간 광인 전략을 연마해왔다. 이 전략은 상대가 정상인이고, 내가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광인이란 두려움만 줄 수 있으면 강력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진짜 광인이라면 결과가 황당해질 수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절실한 게 안전 보장인데, 하필 상대가 트럼프이고 과거의 우리처럼 거국적인 ‘광인’ 모드로 돌변할 수 있는 단결력이 없다.
광인 전략의 원조는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행동의 반복으로 소련을 코너로 몰고 갔던 닉슨이다. 트럼프는 닉슨의 벼랑 끝 전술을 많이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닉슨이 부통령이던 시절 한국에서 이승만을 만났고 그때 포로 석방과 광인 전략에 대해 닉슨에게 자세하게 해명? 아니 전수해줬다고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진짜 사부는 이승만인 셈인가? 혈맹과 우방? 예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자기 이익이 최우선인 게 미국의 본질이다. 지금의 행동? 그게 진짜 모습이고 앞으로도 반복될 거다. 우크라이나의 딱한 처지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가끔은 광인 전략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트럼프, 푸틴, 시진핑, 김정은, 광인 천지인 세상에서 거래할 만한 강력한 무엇이 있어야 국가 대접이라도 받겠다는 사실이 우울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기적 성과에 빠져 미군을 철수시킨 대통령들은 끝이 좋지 못했다. 닉슨은 탄핵 직전 사임했고 부시와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다. 트럼프도 연속 당선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건 함부로 빼내면 ‘험한 것’이 튀어나오는 뭐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