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묘비명 ‘프란치스쿠스’… 검박한 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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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인사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여 개국 대표단과 함께 25만 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고, 15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 26일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 참석자들의 면면과 추모 인파는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14억 가톨릭 신도들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장례식은 검박했다. ‘가난한 이들의 겸손한 수호자’였던 교황의 유언대로 품위 있되 소박한 마무리였다.

▷21일 선종한 교황은 전임자들과 달리 방부 처리를 않고 세 겹이 아닌 홑겹 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았다. 선종 후에도 우상이 되기보다 인간적이었던 교황의 마지막 모습에 조문객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지인 성모 대성전에서 교황의 관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76세에 즉위한 후 12년간 68개국을 돌며 약자들을 위로했던 고단한 몸은 땅 아래 묻혔고, 고급 대리석 대신 증조부 고향에서 캐낸 ‘민중의 돌’로 만든 비석엔 ‘빈자의 성인’에서 따온 교황의 라틴어 이름만 새겨졌다. ‘프란치스쿠스’.

▷검소했던 장례 절차는 교황직을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다. 교황청은 보유 자산이 최소 8조5000억 원에 연간 예산이 1조2000억 원이지만 교황은 ‘가난 서약’에 따라 월급(4600만 원)을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후로도 월급(670만∼840만 원)을 받지 않았다. 교황이 남긴 전 재산이 100달러뿐이라는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교황은 저서에서 “교회의 사제, 주교, 추기경들이 고급차를 몰며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썼다.

▷청빈함은 12년 전 남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비결이다. 교황청 안팎으로 비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교황이 된 그는 방만한 재정 개혁에 나섰다. 2021년엔 “교황청 재정은 투명한 유리집이 돼야 한다”며 교황청이 전 세계에 보유한 5000여 개 부동산 실태를 공개했다. 교황청 고위직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영국 런던의 고급 빌딩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큰 손해를 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연간 800억∼900억 원의 적자 해소를 위한 추기경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기울였던 과제다.

▷한국에선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유흥식 4명의 추기경이 나왔고, 이 중 2명이 선종했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 장례미사는 일반인과 별 차이 없이 소박했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 때는 코로나로 더욱 간소했다. 김 추기경은 각막 기증으로 빛을,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주고 떠났다. 모든 걸 내어주고 빈손으로 떠난 성직자들을 보며 혼탁한 뉴스로 어지러운 세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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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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