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홀린 '벨벳 바리톤'…"오페라는 마라톤, 내 속도로 집중해야죠"

3 days ago 5

푸치니의 오페라 대작 ‘라 보엠’에서 쇼나르 역을 맡은 바리톤 김기훈(맨 오른쪽). 그는 이번 시즌 처음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마티 솔, 메트 오페라 제공

푸치니의 오페라 대작 ‘라 보엠’에서 쇼나르 역을 맡은 바리톤 김기훈(맨 오른쪽). 그는 이번 시즌 처음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마티 솔, 메트 오페라 제공

바리톤 김기훈(34)의 SNS 계정은 본인의 이름 뒤에 ‘슈퍼 바리톤’을 이어 붙인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담은 메시지일 수도 있다. 김기훈은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 입상에 이어 2021년 BBC 카디프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또 한 명의 스타 탄생을 알렸다. 영국 가디언은 그를 ‘벨벳 바리톤’이라고 평가했고, BBC 매거진은 그를 ‘롤스로이스급 목소리’라고 칭송했다. 최근 미국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서 ‘라 보엠’을 10회 소화하는 그를 무대 뒤에서 만났다.

“메트 오페라에 서는 것이 최종 목표였어요. 막상 와서 보니까 메트 오페라 평균 데뷔 나이가 40대 정도 되더라고요. 다른 가수들에 비해 10년 정도 일찍 행운이 찾아온 셈이죠.”

그의 미국 데뷔는 2023년 가을, 미국 댈러스 오페라에서 ‘스카르피아’ 역을 맡으면서였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로 로마 경찰의 실세로서 여주인공 토스카에 집착하며 권력을 가진 자의 교활함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배역이다. 성악적, 연기적 역량 모두를 요구하기 때문에 주로 커리어 후반에 맡게 될 때가 많다. 호평이 이어진 뒤 지난해 11월 메트 오페라의 대표작 ‘라 보엠’의 ‘쇼나르’ 역을 따냈다.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독일 하노버 극장에서 일하다가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인정받은 뒤, 미국 무대에 진출한 그를 두고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사실은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노래하고 있는 바리톤 김기훈 /마티 솔, 메트 오페라 제공

노래하고 있는 바리톤 김기훈 /마티 솔, 메트 오페라 제공

김기훈은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낚시하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아버지와 출조를 떠난다. 언제라도 공을 받아줄 상대만 있으면 캐치볼을 즐기는 야구광이기도 하다. 컴퓨터 게임도 빠질 수 없다. 어린 시절 책에 파묻혀 살았고, 소설부터 과학 서적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밴드에서는 키보드와 보컬을 맡았다. 친구와 함께 놀고 싶어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7년간 사물놀이에서 꽹과리를 잡았다. 가족 중 음악을 공부한 사람은 없지만 네 식구가 차를 타면 가족 노래방으로 바뀐다며 웃음 지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들이 성악을 해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결사반대한 사람이 노래를 제일 좋아하던 아버지였다고.

“제 커리어를 멀리서 보면 상승곡선처럼 보여요. 여유 있는 집에서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살았을 것 같지만, 저도 좌절을 겪었고 그만두려고 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노래를 제대로 배울 곳이 없어 광주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다닌 적도 있지만 곧 절망하고, 대학 1학년을 마친 뒤 곧바로 군입대를 선택했다. 군 면제를 받는 콩쿠르에 매진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국방부 군악대가 아니라 일반병으로 입대했고, 사단 군악병으로 금관악기를 연주했다. 복무 기간 훈련, 악기, 노래, 그리고 사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최선을 다했지만 제대를 앞두고 성대결절이 찾아왔다. 복학 후에도 성대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목소리를 조금씩 회복했다. 사형선고와도 같았던 위기를 극복한 순간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김기훈은 편안하게 노래하는 가수다. 유럽의 유수 오페라 극장 중엔 2000석을 넘는 곳이 많지 않은데, 4000명을 수용하는 메트 극장의 규모에 우선 놀랐다고. 하지만 그 크기에 비해 노래하기 어렵지 않은 음향을 갖춘 점이 더 인상적이라고 했다.

“무대와 객석의 압도적 규모 때문에 가수들의 무덤이 될 수도 있는 곳이죠. 소리가 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오페라는 마라톤과 같아서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붓지 않고 나만의 보폭과 속도로 성량보다는 퀄리티를 생각합니다.”

그는 치열하게 경쟁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더라도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천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콩쿠르도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아보고 싶어서 출전한 것이라고 했다. 노래는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것이라 예민해지지 않으려 한다는 그는 징크스나 루틴을 만들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도 말했다.

김기훈은 대학 재학 시절 자신을 가르쳐준 김관동 교수에게 굳게 한 약속이 하나 있다. 큰 극장에서 노래하게 되면 선생님을 꼭 초대하겠다는 것. 그 약속은 다음달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돈 카를로’로 무대에 서며 지킬 수 있게 됐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