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꿈에 그리던 경인공전을 다니며 부품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창우(유이하)는 엄마(강진아)와 가까스로 마련한 방 세 칸짜리 집에서 독방을 얻는다. 동생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막내는 아직 어리다. 상조회사에서 영안실 관련 일을 하는(듯한) 엄마는 막내를 너무 예뻐한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정규 대학을 준비 중인 둘째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을 끼고 산다. 큰아들은 한국 산업화 시대의 가정이 늘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산업 현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든 가정이 그렇듯이 한 가족 전체의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 된다. 창우는 실습비와 취업장려금을 모아 엄마와 새집을 마련한다. 방도 동생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바깥 베란다 세탁기와 연결된 곳이다. 창우는 착하다.
이 어린 젊은이의 유일한 취미는 기타인데 그는 종종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뚱땅거린다. 기타 줄을 튕기는 오른손 팔뚝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이곳저곳 긁히고 베인 상처들이 나 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 그것도 한 컷에 불과한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짠해진다. 허구한 날 방송과 극장에서 촉탁 소년들, 일진들의 폭력 얘기만 보다 보니, 착한 청소년들의 아픈 팔뚝 같은 건 잊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그간 무엇을 지나치고 살았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닫게 만든다. 영화 ‘3학년 2학기’는 바로 그런 영화이다. 주인공 팔뚝에 나 있는 생채기 하나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 뛰어난 디테일의 영화이다.
노동쟁의에 참여하는 파업 노동자들도 휴가는 가야 한다는, 그 휴가 기간에도 노동자는 아이 학비를 위해 한시도 쉬지 못한다는 독특한 소재의 영화 ‘휴가’로 노동운동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찍었던 ‘감독 이란희 – 프로듀서 신운섭 부부’ 두 사람은 이번 영화 ‘3학년 2학기’로 드디어 한국 노동운동 영화의 정점을 찍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과도 다르다. 영국의 켄 로치와도 다른 선상이다. 그건 한국 노동계의 현실, 한국 노동운동의 특수성이 유럽의 그것과 다른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 이란희가 이루어 낸 것은 한국만의 노동운동 영화 그 원형을 찾아냈다는 점에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현대사회의 노동자들이 노동의 시작, 노동 현장의 시작을 제도권 내 어디에서 언제부터 하게 되는 건지 그 ‘시발점’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노동자로 태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은 바로 공고 졸업반 3학년 2학기 때부터이다. 이걸 많은 사람은 아는 척,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이 내신 점수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인턴 활동으로 스펙 쌓는 걸 도와주느라(강남 학부모들의 치태, 癡態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공고 졸업반 학생들, 선생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는지 알지 못한다.
요즘은 공고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도 차별적 용어로 치부된다. ‘테크노’란 단어를 섞으면서 적당히 눈 감고 아웅한다. 주인공 창우와 친구 우재(양지운)는 경인하이텍과학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다. 이제 2학기에 접어들었고 학교를 통해 연결된 부품 공장에 실습생으로 들어가려 한다. 실습생이 되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실습생이 되면 6개월간은 매달 646,000원을 받고 일한다. 나중에 해당 회사에 취업이 되면 취업장려금 5백만 원을 받는다. 만약 경인공전 같은 2년제 대학을 가면 장학금을 받기도 한다. 대체로 창우 같은 아이들의 꿈은 공장을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 이어 가다가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병역특례도 받을 수 있다. 국가란 시스템은 군인보다 숙련된 노동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우는 그렇게 뛰어난 아이가 아니다. 창우는 스스로가 취업도 순조롭게 이어지고 학교도 순탄하게 진학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공장 대리로부터도 느리고 산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3학년 2학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가죽 앞치마와 토시이다. 추락 방지용 안전장치도 매우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장비, 그리고 한 가지 장치는 사람들로 영화 내내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무슨 일이 곧 터질 것 같은 서스펜스를 주기 때문이다. 가죽 앞치마와 토시는 그라인더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라인더는 스위치를 누르더라도 바로 작동이 멈추지 않는다. 자칫 손가락이 잘리는 등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회사는 단 몇만 원짜리인 앞치마를 갖추어주지 않는다. 회사를 점검할 책임이 있는 노무사도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국가와 시스템은 늘 선제적이지 못해서 혹은 선제적이지 못한 척 자본의 편에 서는 쪽인데 영화 속 노무사(박소윤) 역시 일 잘하는 공장 내 에이스 실습생 성민(김성국)의 지적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인다. 성민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것도 이 노무사가 실적만 올리려 할 뿐 제보자인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뿐더러 결국 작업 환경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인공 창우는 당사자이자 관찰자이다. 영화는 일인칭 시점이자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창우는 어쭙잖고 겁이 많다. 그의 표정은 늘 뭔가가 ‘우수수’ 떨어지는 형국이다. 공장 친구 성민이 ‘당하는’ 일에 대해서도 너, 너, 너 하다가 그만두게 된다. 집안일에서도 대입을 준비 중인 동생과 어린 막내에게 치인 채 그저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창우는 주체적이지 못하다. 영화는 그런 그가 결국 숙련된 노동자로 태어나는 것, 그래서 ‘사용자적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정체성을 찾아 비로소 노동의 주인이 돼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영화 ‘3학년 2학기’는 무릇 대책 없이 비극으로 끝나는 어쭙잖은 노동 영화에 비해 확실하게 사회주의의 낙관을 찍어낸다. 사회주의는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노동운동은 결국 찬란한 성취를 향해 나아가며 모든 사람이 대체로 수평적인 복지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와 체제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은 신성한 것이며 희망이 어린 것이다.
영화 ‘3학년 2학기’는 즐겁고 유쾌하지는 않지만 매우 낙관적이다. 그 점이 좋고, 그 점이 특징인 작품이다. 노동 영화를 표방하는 영화치고 톤 앤 매너가 고르고 균질하다. 징징대지 않고 악악대지 않는다. 투쟁적이거나 선언적이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그럼으로써 무엇을 바꾸어 내야 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심지어 영화 속에 나오는 공장 대표, 과장, 대리 등등도 그렇게 악덕으로까지는 묘사하지 않는다. 감독 정주리가 만든 ‘다음 소희’(2023)는 뛰어난 서사에도 불구하고 이 ‘3학년 2학기’에 비하면 다소 작위적이었다는 성찰을 갖게 만든다. ‘3학년 2학기’는 현실에 두 발을 그만큼 더 단단히 내리고 있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뛰어난 특질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 시퀀스가 압권이다. 창우의 마음속은 결코 태평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장의 하루 풍경은 오늘도 비교적 무사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평온 속의 전쟁. 찻잔 속의 태풍. 당신은 노동을 아는가. 당신은 노동의 현실을 아는가.
청소년들에게 3학년 2학기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한부를 선고받는 환자의 심경이 되는 시기이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죽고 싶거나 죽기 일보 직전이다. 그 경각의 순간에 우리 사회 한 편에서 노동자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학원물, 청소년용이 아니다. 영화는 때론 세상을 단 1도라도 각을 틀게 만든다. 노동 영화도 노동 현장의 각도를 적어도 수십 도는 바꿔 낸다. 바로 이 영화 ‘3학년 2학기’가 그런 영화이다. 극찬이다. 상찬이라 한들 그것이 마땅한 작품이다. 지난 9월 3일 개봉했다. 전국 상영 중. 그러나 스크린은 과히 많지 않다. 그건 늘 그렇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