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인생 일기] 죽음 직전 나를 살린 최고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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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5.27 17:48 수정2025.05.27 17:48 지면A29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그것이 2007년도 일이니까 벌써 18년 전인가 보다. 그해 3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정확하게 다섯 달 20일 동안 나는 완전히 사로잡힌 짐승이었고 도저히 살아나기 어려운 응급실 환자였다. 대전의 한 대학병원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나는 의사마다 살아나기 어려운 환자라고 진단하고, 그들이 먼저 손을 놓고 싶어 했다.

병명은 까다롭게도 담즙성 범발성 복막염. 조금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쓸개 물이 완전히 터져서 그 물이 복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여러 장기를 훼손해 배 전체가 복막염을 유발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췌장이란 장기까지 녹여 급성 췌장염을 일으킨 상태였다.

"수술 불가, 회생 불가입니다"

[나태주의 인생 일기] 죽음 직전 나를 살린 최고의 약

전신이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휩싸였고 급기야 염증 수치는 패혈증 직전까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스스로 알게 된 내 염증 수치는 12㎎/㎗였다. 통계나 상식에 따르면 건강한 성인의 염증 수치 정상 범위는 0~0.5㎎/㎗이며 1㎎/㎗까지 정상으로 보아준다는데, 12라면 이것은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못 하는 일이었다.

대전의 대학병원에 있는 동안 날마다 고열과 헛소리와 발한(發汗) 속에 살았다. 가끔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석 달 가까이 그렇게 헤매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수술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짐을 싸서 퇴원하고 무작정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외과 의사의 첫 진단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이미 죽었을 사람이 왔군요. 예전엔 이런 환자가 있었지만 요즘엔 이렇게까지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열어봐야 떡이 됐을 텐데 건질 것이 없겠네요. 어떤 의사도 환자와 같은 분을 맡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수술 불가, 치료 불가, 회생 불가입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그대로 사형선고 같은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그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사흘이 되는 날, 담당 의사가 찾아와 한마디 더 해줬는데 그 말은 더욱 무서운 말이었다. 재차로 내린 사형선고 같은 것이었다. “이제 환자는 하루 24시간을, 아니 1분 1초를 소중히 알고 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패혈증 직전인데 패혈증이 발생하면 곧장 수술해줄 것이지만 거기까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그다음은 누구도 보장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생력을 믿으십시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용기를 내어 담당 의사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런 나의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담당 의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몇 마디를 더 보태줬다. “자생력이나 믿으시지요. 인간에게는 자생력이란 게 있습니다. 못에 찔려 죽는 사람도 있고 큰 상처를 입고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생력 차이입니다. 그러니 자생력이나 믿으십시오.”

자생력이나 믿으라고! 그것은 더욱 무서운 말이었다. 말인즉슨 자생력 외에는 달리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머릿속이 휑하니 돌았다. 이제 어쩐담? 도대체 이 의사 선생님은 나더러 어쩌란 얘기인가?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생력? 자생력? 그래 자생력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이 병원에서 사로잡힌 환자 입장에서 어떻게 내가 자생력을 갖는단 말인가. 생각하고 생각하던 나의 눈에 병실 귀퉁이에 놓인 양란 화분 하나가 들어왔다. 그것은 누군가 퇴원하면서 버리고 간 화분이었는데 아직도 꽃송이가 싱싱한 채로 매달려 있었다. 그렇다. 저 화분의 꽃이라도 한번 그려보자. 내가 학교에서 선생을 할 때 연필로 꽃 그리는 걸 좋아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내에게 간호사실에 찾아가서 복사지 몇 장을 얻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복사지를 얻어왔을 때 나는 돋보기를 찾아 쓰고 침대에서 내려온 뒤 의자에 앉아 그 양란 화분의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상 나는 화가가 아니다. 복사지 한 장 크기의 연필그림을 그리려 해도 오랜 시간 그야말로 자세히 오래 봐야만 겨우 그 형상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

아내의 근심 어린 눈길 속에 드디어 그림 한 장을 완성했을 때 나는 뜻밖의 느낌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흐릿하게나마 기쁨과 같은 감정이었고 나도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감동 같은 것이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마음과 이런 느낌이 나를 살리겠구나. 나는 천천히 자생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치고 있었다.

자생력. 그것은 끝없는 긍정의 마음이고 자신을 믿는 마음이고 드디어 작지만 기쁨을 느끼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죽어가는 몸과 마음을 살리는 게 아닐까? 나는 그로부터 틈만 나면 침대에서 내려와 연필그림을 그렸다. 나아가 시를 쓰기도 했다. 놀랍게도 병실에 환자로 묶여 살면서 문학사상사란 출판사에서 신작 시집을 출간했다. 나는 절체절명의 병고 속에서 패혈증 직전의 나를 건져낸 것이 분명히 자생력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의 충고는 어떤 약이나 처방보다 훌륭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도 누군가 힘든 처지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 자생력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보고 자생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지레 손을 놓지 마십시오. 우선은 긍정의 마음이고 자기를 믿는 마음이고 삶과 미래에 대한 강한 소망이고 나아가 기쁨을 찾아내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능력만 있다면 당신도 어려운 고비를 충분히 넘길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생력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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