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무대 구석. 긴 생머리에 청바지 차림, 화장기 없는 얼굴의 ‘유진’(김새론)이 환하게 웃으며 무명 기타리스트 ‘기철’(이선정)을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유진은 낮에는 아이돌 기획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인디 밴드 ‘볼케이노’ 키보디스트로 살아가는 인물.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기철에게 “꿈을 위해 산다는 거 멋지다”고 치켜세운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기타맨’은 올 2월 세상을 떠난 고(故) 김새론 배우의 유작이다. 지난해 11월 촬영돼 최근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에서 연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제작과 감독, 기철 역까지 맡은 이선정 감독은 21일 간담회에서 “촬영할 때가 새론 씨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카메라만 켜지면 돌변했던 ‘천상 배우’였다”며 “편집 작업을 하며 새론 씨 얼굴을 보는 게 가장 힘들었지만, 고인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 영화를 개봉하게 됐다”고 했다.● 우리 곁을 떠나간 소녀
배우 김새론은 2001년 잡지 ‘앙팡’ 표지 모델로 데뷔해 2009년 이창동 감독이 제작한 영화 ‘여행자’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아홉 살이던 그는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보육원에 버려진 아이 ‘진희’ 역을 맡았다. 그해 ‘여행자’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이 됐고, 고인은 칸의 레드카펫을 밟은 최연소 한국 배우가 됐다. 세상이 한때 그를 ‘칸의 소녀’라고 불렀던 이유다.
대중에게 널리 이름을 알린 건 이듬해였다. 2010년 영화 ‘아저씨’에서 배우 원빈과 호흡을 맞춘 김새론은 어른들의 세계에 짓밟힌 소녀 ‘소미’로 분해 628만 명의 관객을 울렸다. 아역으론 드물게 느와르 장르를 오롯이 소화하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014년엔 영화 ‘도희야’로 다시 칸에 초청받았다. 열다섯 살이 되기 전 두 번이나 칸 레드카펫을 밟은 한국 배우는 그뿐이었다.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2011년)과 예능 ‘도시어부’(2018~2021년), 음악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2015~2017년) MC 등 고인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스펙트럼을 넓혔다. 특히 일제 종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 ‘눈길’(2017년) 등에서 강한 서사를 품은 캐릭터를 주로 맡아, 어린 나이에도 참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해”하지만 2022년 5월 음주운전이 적발된 이후 그의 인생은 기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작품이 끊기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동정보다 비난이 컸다.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2023년)에 출연을 예고했으나 논란이 커져 결국 하차했다. 지난해엔 연극 무대로 복귀를 시도했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품이 영화 ‘기타맨’이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촬영을 마치고 약 3개월이 지난 뒤 만 25세에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기타맨’은 작품성이 높은 영화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가득한 유진은 고인의 짧지만 뜨거웠던 연기 인생과 겹쳐진다. 극 중 에서 기철이 유진을 위해 만든 곡(“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해. 난 아직 할 말이 많은데”)이나 유진이 기철의 꿈 속에서 털어놓는 대사(“나 이제 가야 해. 혼자 가기 무서워”)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유진의 밝은 표정은 뒤늦게야 열어보는 마지막 선물과도 같다. 영화에서 유진은 회사에서 ‘물망초’를 알뜰살뜰 돌본다. 한 동료가 꽃말을 묻자, 잠시 머뭇거리다 카메라를 보고 미소 지으며 답한다.“나를 잊지 마세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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