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구축함 연간 건조 능력 1.6척 불과… 한국은 더 싸게 10척 생산 가능
심상치 않은 국제 정세에 미국은 7월 들어 한국에 ‘피아식별’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7월 10일 케빈 김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방한해 ‘동맹 현대화’를 언급한 게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에서 韓美 군대 역할 재조정”
7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차관 회의에선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 이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해당 조항은 “태평양 지역에서 어느 한 당사국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다른 당사국도 이를 자국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해 행동해야 한다”는 게 뼈대다. 7월 24일에는 “한미 양국이 한국의 방위 부담을 확대하고, 한반도에서 미국과 한국 군대의 역할·책임을 재조정하는 ‘동맹 현대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미 국무부 대변인 성명이 나오기도 했다. 그간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인 안보 우산을 제공받은 한국도 동맹으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취지로 읽힌다.
한국은 미국 감시정찰 자산의 도움이 없으면 북한의 전면 침공이나 미사일 공격을 조기에 파악해 대응하기 어렵다. 미국이 미사일방어(MD) 자산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유사시 북한이 퍼붓는 미사일 세례를 고스란히 얻어맞아야 한다. 당장 탄약만 해도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전면전 개시 1~2주 후 한국군 탄약고는 바닥날 것으로 추산된다.
감시정찰·조기경보 자산 획득과 MD 구축, 예비 탄약 확보는 하나같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가령 하루 두 번 한반도 상공을 지나는 저궤도 정찰위성은 해상도가 떨어지는 모델조차 가격이 3억~5억 달러(약 4150억∼6900억 원)에 달한다. 고해상도 정찰위성은 10억~15억 달러(약 1조3800억∼2조 원)는 들여야 확보할 수 있다. 한반도 상공을 1시간에 1번씩 촬영하려면 최소 12기 넘는 위성이 필요하다. 위성 수명이 끝나는 5년 단위로 교체도 해야 한다. 13년 전 한국이 대당 4억 달러(약 5500억 원)에 산 조기경보기 가격은 최근 대당 25억 달러(약 3조4600억 원)까지 치솟았다. RC-135 시리즈 정찰기 같은 미국 감시정찰 자산은 대체 비용을 추산하기조차 어렵다.
조 단위 정찰위성 확보 비용
그렇다고 한국만 미국에 일방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오직 한국만이 해결할 수 있는 미국의 ‘가려운 곳’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조선(造船), 정확히는 군함을 만드는 건함(建艦) 협력이다. 한국은 이 카드를 적극 활용해 미국의 통상·안보 압력에 대응해야 한다. 미국이 한국과의 조선 협력에 관심이 크다는 보도는 이미 많이 나왔다. 한국이 배를 잘 만든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막강한 군함들로 구성된 세계 최강 해군력을 가진 미국이 왜 한국과의 건함 협력을 원하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에는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존스법(Jones Act)’이라는 법이 있다. 미국 항구를 오가는 배는 미국인 소유의 미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해야 한다는 게 뼈대다. 이 때문에 미국 내 항구(해군기지)를 오가는 모든 미 해군·해안경비대 함정은 미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해야 한다. 외국 조선 업체는 미 해군·해안경비대 건함 사업에 참여할 기회 자체가 없다. 미국 조선소들의 ‘짬짜미’에 의한 독과점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선 해군 해양시스템사령부(NAVSEA)가 군함 개발을 도맡는다. 미국 조선소는 NAVSEA가 발주한 선박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관리·감독만 받는다. 개별 조선소 입장에선 기술 개발이나 설비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의 조선 인프라는 매우 낙후됐고 여전히 인력 집약적인 방식으로 배를 건조한다. 기술 발전이 정체되면서 미국 조선업 현장의 노동 강도는 매우 높은 상황이다. 어지간한 고임금을 주지 않으면 노동자를 구하기조차 어렵다. 결국 미국 조선소는 똑같은 배를 만들어도 외국보다 시간과 비용이 몇 배 이상 들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 의회예산처(CBO)가 지적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미국 조선업의 비효율을 절감할 수 있다. CBO가 1월 작성한 ‘미국 차세대 구축함 DDG(X) 사업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대 초반 배치되는 이 구축함의 예상 획득 가격은 척당 44억 달러(약 6조1000억 원) 수준이다. DDG(X)는 SPY-6V(1) 레이더와 이지스 전투체계, Mk.41 수직발사시스템 96셀(cell)을 갖출 예정이다. 현재 배치되고 있는 알레이버크급 플라이트 Ⅲ 구축함과 비교하면 레이더 모듈이 늘어나고, Mk.41 일부가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용 대형 VLS로 교체되며, 만재배수량이 40%가량 늘어난다. 아무리 성능이 개선됐다지만 알레이버크급 플라이트 Ⅲ(25억 달러·약 3조5000억 원)와 비교하면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 심지어 지금 나온 DDG(X) 가격은 어디까지나 예상치다. 앞으로 10년 뒤 나올 이 배는 척당 7조~8조 원에 달할 수도 있다.
미국 의회예산처, 자국 조선업 비효율 지적
DDG(X)의 높은 가격은 차세대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비하면 ‘애교’다. 버지니아급 후속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모델로 개발 중인 SSN(X)는 당초 2030년대 초반부터 건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높은 가격 탓에 예산 확보가 어려워 2040년대 초반으로 건조 시점이 미뤄졌다. CBO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잠수함의 가격은 척당 87억 달러(약 12조 원)다. 현재 미 해군에 배치된 버지니아급 잠수함은 25억 달러 정도에 도입됐고, 곧 배치 예정인 확대·개량형인 버지니아급 블록 V 모델 가격은 43억 달러(약 6조 원) 수준이다. 비슷한 크기의 차세대 잠수함 가격이 기존 모델의 2∼3배에 달하는 것이다. 차세대 전략 원자력 잠수함인 컬럼비아급의 가격은 더 충격적이다. CBO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잠수함 초도함의 가격은 152억 달러(약 21조 원)에 달한다. 2번함부터 가격이 93억 달러(약 12조9000억 원)까지 내려가는 것으로 추산됐지만 이 또한 엄청난 가격이다.
미국산 군함이 이처럼 비싼 주된 이유는 노동 집약적 건조 방식 때문이다. 공정(工程) 대부분을 사람이 직접 하는 구조라서 건조에 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비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령 미국 해군 구축함은 2개 조선소가 일감을 나눠 수주한다. 이들 조선소의 생산 효율이 워낙 떨어지다 보니 건조 능력을 모두 합쳐도 연간 1.6척이 한계다. 구축함 1척을 건조하는 데 최소 2~3년이 걸리는 실정이다. 잠수함도 2개 조선소에서 건조하는데, 모두 합쳐 연간 1.2척 정도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 같은 조선업 퇴조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상당수 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유럽연합(EU) 차원의 ‘짬짜미’ 때문이다,
반면 한국 조선소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지녔다. 단적인 예로 알레이버크급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정조대왕급 구축함 가격은 절반 수준인 1조3000억 원 정도다. 현 설비와 건조 능력을 기준으로 해도 HD현대중공업 조선소 한 곳에서만 매년 알레이버크급 구축함 5척을 찍어낼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설비를 늘리면 건조 능력이 더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한화오션까지 가세하면 한국은 매년 10척 안팎의 구축함을 미국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생산할 수 있다. 최근 중국은 폭발적인 속도로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에 맞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군함을 획득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서 한국 같은 건함 사업 파트너는 없다. 미국은 한국 손을 잡음으로써 급한 건함 소요를 충족할 수 있고, 한국은 동맹국 안보 이익에 기여하는 동시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도 얻을 수 있다.
韓, 美 조선소 반값에 구축함 건조 가능
한국과 미국이 건함 분야에서 손을 잡으려면 한 가지 극복해야 하는 걸림돌이 있다. 바로 한국의 ‘정치적 입장’이다.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를 언급하며 동맹 현대화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미·중 대결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체제에서 한국에 피아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사실상 경고 메시지다. 한국은 그동안 미뤄온 피아식별을 분명히 할 때가 됐다. 한국이 어느 나라와 동맹인지 망각한 채 어긋난 길을 간다면 ‘조선 잭팟’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생존과 번영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500호에 실렸습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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