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은 ‘골프광’답게 골프용어를 가져다 썼다. 하지만 컨시드에 담긴 스포츠맨십 정신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당연히 대가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천문학적인 선물에 대한 각종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이 표현을 쓴 걸 보면 더 그렇다.
필드 위에서 컨시드를 주느냐 마느냐에는 딱 부러진 기준이 없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기를 원활하게 만드는 관행이자 예의이기 때문이다. 컨시드의 가치는 치열한 승부일 때 특히 빛난다.
미국과 유럽의 골프대항전 ‘라이더컵’의 1969년 대결은 ‘더 컨세션(The Concession)’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1927년 시작된 라이더컵의 100여 년 역사상 가장 박빙의 승부였던 이 대회에서 미국의 마지막 주자였던 잭 니클라우스는 승리를 목전에 둔 순간, 영국 선수에게 컨시드를 줘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 요행으로 이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니클라우스는 소속 미국팀으로부터는 ‘다 잡은 경기를 내줬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스포츠맨십의 대표 사례’로 골프 역사에 기록됐다. 반대로 승패에 집착한 많은 골프 선수는 종종 클럽을 내던지고 동료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으로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치판’ 역시 품격과 신뢰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필드와 흡사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닌 ‘적대자’로 인식한다. 그의 사전에 ‘양보’나 ‘인정’은 없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패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재집권 후에도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사에 대한 각종 보복을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진짜 ‘컨시드’ 정신을 발휘해야 했던 곳은 천연가스 부국 카타르와의 회담장이 아닌 백악관과 의회였지만 그는 이 공간을 전쟁터로 변질시켜 버렸다.
엿새 뒤로 다가온 우리나라 대선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진영 간 대결이 극단적 감정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대선 이후의 혼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후보자들이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고 때론 ‘퍼팅 양보’를 허용하는 스포츠맨십은 찾아볼 수 없다. 각 후보자의 지지층 또한 상대 진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신 아예 ‘녹아웃’ 시키려 달려들고 있다. 열성 팬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타협’이 아닌 ‘압도적 승리’만 요구한다. 초유의 계엄 사태 이후 사회는 쩍 갈라졌고 골목상권은 텅 비었다. 세대 간 갈등은 연금 등 민감한 이슈를 놓고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지금 한국이 마주한 문제들은 누구도 혼자 밀어붙여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정치권이 이런 문제들을 놓고 정책적 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을지 유권자 입장에선 쉽게 상상하기가 어렵다.한국이든 미국이든, 정치에서 ‘컨시드’가 필요한 시점은 존중과 스포츠맨십이 상실된 지금이 아닐까. 컨시드는 골프에서 시작됐지만, 이제 정치에 더 절실해졌다.
홍정수 국제부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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