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과학기술 정책은 인공지능(AI) 3대 강국, 연구개발(R&D) 예산 증대, 연구자 중심의 연구 환경 개선, 지역 과학기술 역량 강화 등으로 요약된다. 대기업과 시장 중심인 보수 정당과 달리 확대 재정을 통해 정부 역할을 강조하고, 지역과 인재 중심 정책을 제시한 전통적인 진보 정당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30조원 규모 국가 R&D 예산을 장기적인 계획하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칩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원천 기술을 개발한 김정호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3일 “HBM은 K반도체의 희망인데, 정부가 지원한답시고 개입하는 순간 경쟁력은 떨어진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제품 개발은 기업이 하는 것이고, 국가는 기초 기술과 석·박사 인력을 배출함으로써 기업 경쟁력에 도움을 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반도체산업을 지원한다면서 전담 조직을 만드는 식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혁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대만의 반도체 성장을 예로 들며 “인재 양성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00년 초반 반도체 외에 살길이 없다고 판단한 대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반도체를 가르칠 대학교수를 대거 뽑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 이공계 인기가 떨어지고 의대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대만국립대에는 반도체 전공 교수가 50명이나 되는데 서울대는 20명에 불과하다”며 “반도체업계에선 교수 한 명 한 명이 중요한데 30명 차이면 엄청난 것이고 게다가 대만은 장학금 지원, 주거공간 제공 등의 혜택을 통해 동남아시아 이공계 인재를 엄청나게 빨아들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김우승 전 한양대 총장은 “또다시 관료들이 제출하는 보고서상 수치 달성에 만족하는 과학정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AI 강국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거의 모든 대학의 연구 과제가 AI라는 간판 갈이로 변질될 것”이라며 “각각의 대학이 어떤 경쟁력이 있는지, AI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정부 예산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를 개선할 대안으로 김 전 총장은 대학 연구 이력제 도입을 제안했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초대 원장은 과학기술 정책의 거버넌스 혁신을 제안했다. 그는 “AI가 개인의 삶과 산업, 기업과 국가의 모습까지 바꾸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있고, 미·중 패권 전쟁으로 새로 형성되는 세계 체계는 변화를 선도하는 순발력을 갖춘 대한민국에 오히려 기회”라며 “과학기술과 산업, 국방, 외교, 교육 정책의 사일로(폐쇄된 구조)를 없앨 파격적인 국가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