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세연 기자] ‘금융회사 사외이사’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거수기’다. 거수기(擧手機)는 한자 그대로 ‘손을 드는 기계’라는 뜻인데, 회의에서 안건 내용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최고경영자(CEO) 뜻에 따라 무조건 손을 들어 찬성을 표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금융지주사는 지배주주(오너)가 없는데도 이사진이 경영진을 견제하기 보단 그들의 뜻에만 따른다고 해서 ‘사외이사=거수기’란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 KB금융지주 회장 인선에서 활약한 사외이사들은 ‘거수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7명의 사외이사 전체로 구성된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 위원들은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지 않았다. 그들 중 5명 이상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차세대 주자’인 이재근 KB금융 부문장을 선택했다. 현직인 양종희 회장이 최종 후보군(숏리스트)에 있었음에도 현직자의 존재감은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KB금융은 2014년 회장과 은행장이 동반 퇴진한 이른바 ‘KB사태’를 계기로 지배구조를 개편했다. 회장 선임 과정에서 사외이사의 역할 또한 강화해왔다. 이 같은 KB금융만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이번 결과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었다. 금융권 안팎의 환경도 달라졌다. 이재명 대통령의 ‘부패한 이너서클’(폐쇄적 권력집단) 발언부터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까지 CEO와 이사회의 유착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거세다. CEO의 영향력 아래 이사회가 사실상 견제 기능을 잃는다면 아무리 정교한 지배구조를 갖춰도 무용지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KB금융의 선택은 금융회사 이사회가 CEO의 연임을 추인하는 기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만 ‘현직을 선택하지 않는 것’과 ‘독립적인 이사회’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독립성의 목적은 CEO와 다른 결론을 내리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주주와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가장 적합한 경영자를 선택하는 데 있다. 현직이 적임자라면 연임시키는 것 역시 독립적인 판단이다. 반대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외풍이나 내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교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 말 5대 금융그룹 계열사 CEO 50여명의 임기가 줄줄이 끝난다. 이제 이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수기’라는 오명을 벗었다는 선언이 아니다. 회사와 주주의 미래를 위한 ‘진짜 독립적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거수기’ 오명 벗고 ‘독립성’ 강화하는 금융업계 이사회[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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