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대결이 낳은 정치 붕괴
87년 체제, 대통령에 권력집중
집권초 정책 밀어붙이기 반복
여소야대 국면 중재수단 없어
법안 통과지연·탄핵소추 남발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거치며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1987년 헌법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났다.
1987년 헌법 체제는 간선제였던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고 임기를 5년 단임으로 제한했다. 또 대통령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의 인사동의권과 탄핵소추권 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민주화 성과로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통령의 행정 권력과 다수당의 의회 권력이 충돌하는 대결적 구조에 취약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이자 군 통수권을 가지며 입법부인 국회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같은 권력 집중은 국정 운영의 책임자인 대통령이 국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장점인 동시에 대통령 권력이 남용되거나 독선적 국정 운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였다.
특히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국회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하면 국회와 협력하기가 어려워지고 대결 구도로 치닫는 모습이 나타났다.
국정 운영의 근거가 되는 법안 통과의 지연, 예산안을 둘러싼 논쟁, 국정조사와 같은 대립적 상황이 빈번히 만들어지면서 정부와 국회가 서로에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87년 체제’ 이후 5년 단임제로 선출된 대통령 8명 중 3명이 재임 기간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대에 올랐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후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4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처음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달 31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내란·김건희 등 쌍특검법에 거부권을 사용한 것까지 윤석열 정부에서는 국회가 의결한 법안 33건(중복 포함)에 대해 총 14차례에 걸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에서만 30번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윤 대통령에 이어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탄핵 심판대에 세웠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87년 헌법 체제는 진영이 양극화된 대한민국에서 미미한 득표율 차이로 승자 독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역량이 부족한 정치 외부자도 단시간 내에 대권을 잡게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소야대 국면에서 입법부와 행정부 간 갈등을 중재할 그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며 “지금 체제가 지속되면 야당이 탄핵 시도를 반복하고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회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언제든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 체제에서는 국회와 대통령 또는 국회와 총리가 다툴 때 그 어떤 기관도 이를 해결할 수 없다”며 “직접 민주제를 대폭 도입하고 시민의회, 시민배심원 등의 (중재) 방법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물론 국회에 대한 견제 필요성도 제기된다.
국회의원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를 우선시하는 풍조를 만들고 이는 곧 국민의 장기적 이익이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소선구제의 폐해로 양당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거대 정당 간 대립을 줄이기 위해 선거구제를 개편해 다수당 체제를 유도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성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홍익표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결과적으로 보면 정치가 윤 대통령을 너무 강하게 몰아붙여 여당의 공간이 부족했고 정치가 실종됐다”고 짚었다. 이어 “정치력이 복원될 수 있도록 여야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국회는 비상수단으로 사용해야 할 탄핵을 일상적으로 남발할 수 있다. 국정을 마비시키려는 국회에 맞대응할 방안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며 “그런 점에서 의회 해산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독선적으로 국정 운영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데는 ‘5년 단임제’란 한계가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다. 5년 단임제가 대통령에게 집권 초중반에 승부를 보도록 강제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의 주요 정책이 뒤집히고 집권 후 3년이 넘어가면 레임덕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비선실세의 국정 개입을 방관했다가 탄핵을 자초했다. 뒤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시장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부동산 정책으로 혼선을 야기했다. 이 문제는 결국 정권을 내주는 핵심 요인이 됐다. 윤석열 정부는 구조 개혁을 내세웠지만 야당에 비타협적인 태도로 인해 정책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표면상 삼권분립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에 실질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감사원장, 검찰총장의 최종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어 권력기관 독립성이 저하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헌법 교수는 “대통령 권한 축소의 일환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야 하는 임명직 자리를 늘려야 한다”며 “임명직마다 필요한 정족수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1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민주당 간사였던 김영배 의원은 “대법원장 임명 시 인사추천위원회를 꾸리도록 하고 감사원장을 독립기구로 만드는 것부터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문제 해결을 정치권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대통령 권한 축소를 골자로 하는 개헌 논의는 지난 20여 년간 선거 무렵마다 등장하는 단골 화두지만 무위에 그쳤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 의원은 “국회 특위를 해보니 권력 구조 개혁은 거대 정당에 맡겨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안 되려면 시민사회와 전문가가 반드시 참여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