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이 리라화보다 못하다니…"
일본 엔화의 ‘실질 가치’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대외 구매력을 보여주는 실질실효환율이 1973년 변동환율제 도입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시장에서는 “엔화가 세계 최약 통화인 터키 리라보다도 약해졌다”는 충격적인 평가까지 등장했다.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빈 브룩스 연구원은 최근 X(옛 트위터)를 통해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터키 리라보다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실질실효환율은 특정 통화의 국제적 구매력을 물가와 무역 구조까지 반영해 계산하는 지표다. 단순 환율이 아니라 ‘통화의 실질 체력’을 보여주는 척도로 여겨진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올해 4월 또다시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반면 대표적 약세 통화로 꼽혀온 터키 리라는 연초 대비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물론 시장에서는 “엔화가 터키 리라보다 더 약하다”는 표현은 과장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실효환율은 산출 방식이 다양해 국가 간 절대 비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엔화의 실질 가치가 장기 하락세에 있다는 점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배경에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역수지 악화다. 일본은 2022년 연간 20조 엔 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한 이후 최근 적자 폭을 줄여왔지만, 중동 정세 악화와 원유 가격 상승이 다시 부담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장에서는 일본의 무역적자가 연간 5조 엔 수준으로 재확대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여기에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의 확장 재정 기조도 엔화 약세 압력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정부는 최근 3조 엔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결정했다. 고유가 대응과 경기 부양을 이유로 재정지출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초저금리와 적극 재정이 동시에 지속되면 통화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토추종합연구소의 다케다 아쓰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완화적 금융환경 속 적극 재정은 결국 엔화 신뢰 저하와 일본 자산 매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엔·달러 환율 하락폭 자체는 제한적이었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시장 개입이 없었다면 더 큰 엔저가 진행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제는 엔화 가치 하락이 일본 국민들의 체감 구매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일본은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구조인 만큼, 엔저가 심해질수록 수입 물가 부담이 커진다. 최근 일본 내 생활물가 상승 압력이 계속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 회복의 핵심 조건으로 ‘성장’을 꼽는다. 단순 환율 개입이 아니라 내수 확대와 생산성 향상, 전략산업 투자 등을 통해 일본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카이치 정권이 추진 중인 AI·반도체·에너지 분야 성장전략이 실제로 해외 자금을 일본으로 끌어들이고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지가 향후 엔화의 운명을 좌우할 변수로 거론된다.
시장에서는 기대인플레이션이 2%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의 임금 인상→서비스 물가 상승→실질금리 개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형성돼야만 엔화 가치 하락 흐름이 멈출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닛케이는 "다만 이런 구조 변화에는 수년이 걸릴 가능성이 커, 단기간 내 엔화 반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고 짚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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