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 공정의 핵심 장비인 TC본더를 공동 개발하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의 ‘8년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한미반도체 장비만 100% 사용해온 SK하이닉스가 최근 후발주자인 한화세미텍 제품을 구입한 게 불씨가 됐다. 한미반도체는 이에 반발해 최근 SK하이닉스 공장에 파견 보낸 CS(고객서비스) 엔지니어를 전원 철수시켰고, SK하이닉스는 신규 HBM 생산라인에 한미반도체 제품을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핵심 장비 보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SK하이닉스의 HBM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반도체는 최근 SK하이닉스 경기 이천공장의 HBM 생산라인에 배치한 CS 엔지니어 수십 명을 회사로 불러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납품한 TC본더 100여 대를 보수하고, 고장 등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파견한 인력이다. 이에 더해 한미반도체는 “TC본더 가격을 28% 올린다”고 SK하이닉스에 통보했다. 한미반도체가 TC본더 가격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TC본더는 D램을 쌓아 만드는 HBM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열과 압력을 가해 D램을 결합하는 장비다. HBM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장비 중 하나로 꼽힌다.
반도체 장비업체가 고객사 생산라인에서 CS 엔지니어를 철수시키고, 가격 인상을 통보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업계에서는 지난달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에 420억원을 주고 TC본더 14대를 두 차례에 걸쳐 주문한 게 갈등을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미반도체가 TC본더 특허침해 혐의로 한화세미텍을 제소한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오랜 파트너 대신 신생기업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각각 HBM과 HBM용 TC본더 세계 1위인 두 회사 간 갈등이 한국 HBM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협업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온 두 회사가 갈라서면 HBM 생산은 물론 장비 고도화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HBM 왕국' 주역들 정면충돌…내막 들여다보니
복수공급사 선정…8년동맹 흔들, 한미반도체 장비독점 지위 흔들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제조기업에 ‘복수 공급사’ 시스템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그래야 1개 업체의 공장이 멈춰서도 부품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품업체간 경쟁을 붙여 납품단가를 떨어뜨리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복수 공급사 시스템은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의 ‘8년 동맹’에 균열을 부른 빌미가 됐다.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에 집중된 TC본더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위해 후발주자인 한화세미텍을 복수 공급사로 선정한 게 ‘감정싸움’으로 번진 것. 업계에선 50조원(2024년 기준) 규모로 급성장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함께 일군 두 회사의 갈등이 자칫 대한민국의 HBM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 한화 밀어주는 SK에 실망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가 HBM용 TC본더 공동 개발에 나선 건 2017년이었다. 이후 8년간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를 유지했다. 한미반도체는 ‘독점 공급사’ 지위를 유지하며 지난해 사상 최대 매출(5589억원)을 올렸다. 영업이익률은 45.6%에 달했다. SK하이닉스도 한미반도체의 도움을 받았다. 압도적인 수율로 HBM 세계 1위(2024년 점유율 65%)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 한미반도체의 TC본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랬던 두 회사에 균열 조짐이 불거진 건 지난해 하반기부터였다. SK하이닉스가 싱가포르 ASMPT를 TC본더 복수 공급사로 고려한다는 소식이 시장에 퍼졌기 때문이다. 뒤 이어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테스트용 TC본더를 공급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소문은 한화세미텍이 지난달 “SK하이닉스에 420억원 규모 TC본더 공급한다”고 밝히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 강경 대응 나선 한미반도체
한미반도체는 강경 대응에 나섰다. SK하이닉스에 “TC본더 가격을 28% 올리겠다”고 통보하는 동시에 SK하이닉스 공장에 파견한 CS(고객서비스) 엔지니어 수십명을 회사로 불러들였다. 을(乙)인 납품업체가 갑(甲)인 원청업체에 사실상 도발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에 특허침해 소송을 건 사실을 뻔히 아는 SK하이닉스가 한화 제품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이에 맞서 신규 HBM 공장에 한미반도체 TC본더를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두 회사가 이런 강수를 둔 건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미반도체는 최근 세계 3위 D램 업체 미국 마이크론에 TC본더 납품을 늘리고 있다. 대만 공장을 중심으로 HBM 생산라인을 확장하고 있는 마이크론이 한미반도체 물량을 확대하고 있어서다. 한미반도체는 지난해 마이크론에 1110억원 어치를 팔았는데, 올해는 3~4배 늘어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 제품을 구매한 데도 이유가 있다. 특정 장비사에 100% 의존하면 가격 협상력에서 불리할 뿐 아니라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미반도체의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자칫 HBM 생산이 멈춰설 수 있다는 걱정도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2020년 TC본더 개발을 시작해 ‘3차원(3D) 스택’이란 자체 기술을 개발한 한화세미텍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 극적 화해 가능성도
HBM 산업의 선두주자로 불렸던 두 회사의 갈등에 반도체업계에선 우려가 나온다. SK하이닉스 HBM 라인에서 품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다. 국내 대표 반도체 장비 업체로 성장한 한미반도체의 성장성이 약화할 수 있다는 걱정도 끊이지 않는다.
극적 화해 가능성도 거론된다. 극한 갈등이 서로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미반도체가 제시한 28% 가격 인상안을 SK하이닉스가 받아들일 지 여부는 이달말께 판가름 날 전망이다.
황정수/김채연/박의명 기자
>> TC 본더
D램을 쌓아 만드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 공정에서 열과 압력을 가해 개별 D램을 연결하는 핵심 장비. 개별 칩을 일정한 간격으로 쌓고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