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전쟁 위기 속 공급망, ‘최대 효율’ 아닌 ‘최대 대안’ 절실

2 hours ago 2

첨예한 안보-정치 갈등에
‘초크포인트’ 마비 상시화
저무는 ‘적시성’의 시대
전략적 선택권-병렬 역량 필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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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기업 경영을 지배한 핵심 가치는 ‘보이지 않는 손’에 기반한 효율성이었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속도를 극대화하는 ‘적시성(Just-In-Time)’은 이윤 창출을 위한 최선의 가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는 안보와 정치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는 지정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란 내 주요 시설을 공습한 에픽 퓨리 작전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 운항이 급감했다. 미중 관세 전쟁은 글로벌 공급망을 파편화하고 있다. 공급망은 자유로운 교역 통로가 아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전략적 무기로 변모했다. 기업의 피해는 현실이 됐다.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관리 전문기업인 스페라(Sphera)의 ‘공급망 리스크 리포트 2026’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800명 중 73%가 지난 1년간 공급망 교란으로 실질적 손실을 봤다고 답했다.

이제 경영의 패러다임은 적시성에서 유연성(Just-In-Case)으로 이동했다. 단일 경로에 의존하는 구조를 벗어나 다중 경로로 전환해야 생존할 수 있다. 특정 경로가 차단되더라도 대체 공급망을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권’, 이를 사전에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한 ‘병렬 역량’ 확보가 기업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 물류 요충지 붕괴로 공급망 다원화

2026년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 연합군의 이란 타격 이후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심장부인 호르무즈 해협은 선박 통항량이 평시 대비 90% 이상 급감했다. 해상 운임과 보험료는 각각 12배까지 폭등했다. 홍해의 수에즈 운하는 2023년 12월 16일 노르웨이 선적 유조선 스트린다호 피격 이후 후티 반군의 지속적인 미사일 위협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선사들은 최단 거리 항로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 중이다. 운송 시간은 많이 늘어났고, 운임은 2배 이상 뛰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 또한 안전지대가 아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가뭄 탓에 선박 통항이 어려워진 데다, 미중 사이의 지정학적 충돌까지 더해지면서 불확실성이 극도로 커졌다. 특히 파나마 운하 양측 항만을 장악한 중국 자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직접 개입에 나서면서 통제력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비서방 국가들의 물류망 다원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기존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물동량이 급감하자, 중국 일대일로의 일환인 중부회랑과 러시아·이란·인도를 잇는 국제남북운송회랑이 활성화됐다.

미국의 이른바 아메리카 3.0 보호무역주의와 상시화한 관세 전쟁은 글로벌 분업 체계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는 강력한 징벌적 관세를 물리며 동맹국과 기업들에 미국 내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생산해 미국에서 소비하던 종전의 물류 구조는 막을 내렸다. 글로벌 공급망은 북미 중심 체계와 아시아 중심 체계로 뚜렷하게 이원화하고 있다.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주요 아시아 기업들엔 전례 없는 선택을 압박하는 거대한 변화다. 더욱이 최근 피지컬 인공지능(AI)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기술력과 시장을 가진 미국과 중국이 자국 내에서 고부가가치 첨단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세계 시장에 공급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것이 또 다른 지정학적 갈등이나 공급망 재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유연한 체질 개선과 제조 국지화 대비

기업은 리스크 통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유연성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재고량을 늘리며, 리스크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전략적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특정 거점이 봉쇄되더라도 즉시 가동할 수 있는 복수의 공급망 대안이 필요하다. 인내와 회복탄력성에 기반한 병렬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컴퓨터 시스템의 이중화 작업처럼 당장 비용은 증가하지만 공급망 중단으로 인한 전사적 파멸을 막는 일종의 보험이다. 삼성전자가 홍해 사태에 대응해 스리랑카를 경유하는 해상·항공 복합 운송(Sea & Air) 모델을 선제적으로 도입하거나, 테슬라가 미국 서부 항만 마비 시 즉각 멕시코 육상 물류망으로 전환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생산망과 물류망을 북미, 아시아, 글로벌 사우스 등으로 병렬 운용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 유연성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위기 시 복구 시간’과 실질적인 대안 확보 능력을 측정하는 구조로 기업의 핵심 성과 지표(KPI)를 재설계해야 한다. 나아가 글로벌 주요 항만과 물류 거점의 지분이나 독자적인 운영권을 전략적으로 매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위기 상황에서도 화물 하역 및 처리 우선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피지컬 AI와 자동화 기술 발전에 따른 ‘제조 국지화’ 시대도 대비해야 한다. 첨단 로봇과 AI가 생산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리면 저렴한 인건비라는 신흥국의 무기는 사라진다. 미국이나 한국과 같은 고비용 국가도 소비지 인근에서 직접 제조할 수 있게 된다. 숙련 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전 자동화 플랫폼을 구축해 고비용 지역에서도 수익성을 확보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2·3차 하위 공급망 업체의 재고, 생산 능력, 물류 흐름, 재무 상태와 품질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시성도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화주와 물류기업의 전략적 동반 진출 구조도 강화해야 한다. 개별 기업 단위가 아니라 얼라이언스-컨소시엄을 통해 공동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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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선임연구위원 waterfront@kmi.re
정리=백상경 기자 bae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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