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여전히 영화 보는 플랫폼으로 남을 것인가
CJ, 지난해 박찬욱 감독 ‘어쩔수가 없다’ 단 한 편 투자
투자 및 흥행 실패, 제작편수도 줄어 삼중고
‘영화는 스펙터클’ 판타지 걷어내고 퀄리티 높여야
모두가 이구동성 외친다. ‘한국영화 산업은 죽었다’고. 와닿지 않겠지만 업계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실제 상황이다. K-콘텐츠의 선봉장이었던 한국영화가 다시금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써본다.
팬데믹, 극장값 인상…그리고 창의적 콘텐츠의 부재
“영화시장 정체 속에서도 한국영화는 선전했다. (중략)2024년 한국 상업영화 평균 추정수익률은 2023년 수익률에 비해 상당히 개선됐다. 할리우드 파업 등의 영향으로 2024년 외국영화 흥행이 부진한 사이, 한국영화는 팬데믹 이전에 비하면 충분히 회복되진 못했지만 유의미한 수준의 매출액 증가와 수익률 개선을 거둔 점이 고무적이었다.” 이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2024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내용 중 일부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서는 입만 열면 “죽겠다”는 아우성이 넘실거린다.
영화 전문 기자를 그만둔 지 오래지만, ‘미키17’ 개봉과 봉준호 감독 인터뷰에 앞서 기자시사회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오가다 만난 과거 영화계 지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역시나 “죽겠다”였다. 혹자는 기획한 영화에 투자가 너무 되지 않아서 그렇고, 또 혹자는 자신이 배급을 맡은 작품을 극장에 거는 족족 망해서 그렇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영화계 스태프인데, 제작 작품 편수가 너무 줄어서 일이 없어서 죽겠단다. 영화산업 종사자 대부분이 이렇게 이구동성 외치는데, 영진위는 ‘2024년 영화산업의 결과가 고무적이다’라고 언급했다.
영화 배급 사업을 하고 있는 관계자의 입을 빌자면 “작년 CJ ENM이 투자를 결정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 없다’ 단 한 편뿐이었다”라고 한다. 과거 CJ가 많은 수의 작품 투자 결정을 했던 것에 반추한다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불안할 정도로 해석해도 될 법한 단서다. 내가 영화 기자를 하던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영화가 연 100편 이상이 제작됐다. 한국영화는 언제나 호황일 것만 같았다. 글로벌 셧다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투자, 이제 영화가 아닌 콘텐츠 투자가 대세
모든 게 팬데믹 탓일까? 그런 불가피한 단절의 시기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한편에서는 한국 영화의 불황이 관객수가 줄어든 팬데믹 기간 동안 극장이 살기 위해 입장 티켓 가격을 너무 높여서라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 콘텐츠 경쟁력의 저하를 꼽는다. 두 가지 모두 수긍할 만한 주장이다. 2024년 개봉한 영화들의 리스트를 훑어보면, 그런 평가가 왜 도출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보인다. ‘영화관 입장료도 비싸졌는데, 굳이 저런 콘텐츠를 보기 위해 소비를 해야 할까?’ 팬데믹 3년간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미뤘다. 창고 속에는 축적된 영화들이 쌓여만 갔다. 거리 두기 시기에 개봉을 해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 고민의 결과다.
누군가는 용기 있게 개봉을 하기도 했었고, 영 시원찮을 것 같으면 OTT 플랫폼에 판권을 넘겼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콘텐츠의 품질이 과거에 비해 확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 당시 묵혀 있던 영화들이 극장 개봉 혹은 OTT 공개를 통해 지금까지도 우리와 만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관람 후기는 한결 같다. 그러니 한국영화의 침체를 극장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물론 입장 문턱이 높아졌다는 게 크게 작용하긴 하지만) 억지스럽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굉장히 복합적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한국영화 기획이 예전만큼 참신하지 않다. 웹툰, 소설 등의 원작에 기대려는 의지도가 높아졌다. 이런 찰나에 팬데믹이 발생했다. 극장의 활로가 닫히고 OTT 플랫폼이 거대해졌다. 작가, 감독, 배우들이 그쪽으로 넘어갔다. 한국영화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팬데믹과 엔데믹을 거치며 2024년 눈에 띄게 흥행한 작품이라곤 ‘파묘’, ‘범죄도시4’, ‘베테랑2’ 정도뿐이다. 한국영화 시장을 견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CJ ENM의 2024년 영화 성적표만 봐도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2부’(143만 명)로 2024년 출사표를 던지고 ‘도그데이즈’(36만 명)를 선보였지만 역시나 저조했다.
직접 투자, 배급을 맡은 ‘패스트 라이브즈’(12만 명)가 선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어차피 이 작품은 해외 인디 영화였다. 여름 시장 공략을 노렸던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68만 명) 역시 선전하지 못했다. 추석 시즌 영화였던 ‘베테랑2’(752만 명)가 유일하게 성공한 작품으로 꼽힌다. 하반기 가을 개봉작이었던 ‘아마존 활명수’(60만 명)의 성적도 저조했다. 그리고 연말 개봉작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하얼빈’(491만 명)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한 해 결과물을 놓고 보면 CJ ENM 같은 대기업조차 손익 분기점을 넘긴 작품이 몇 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그중에서도 한국영화만 셈해보면 고작 6편을 개봉시켰을 뿐이다.
이게 바로 작금의 한국영화산업의 현실이다. 해외영화까지 합쳐도 영화산업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2024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CJ ENM은 “콘텐츠 투자에 연간 1조 원을 쓰겠다”라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여러 기사를 검색해보면, 결국 영화보다는 ENM의 TV 채널들, 티빙, 넷플릭스 등의 OTT에서 선보이는 시리즈와 예능 프로그램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겠다는 것처럼 읽힌다.
‘영화는 스펙터클’이라는 판타지 포장은 올드하다
암흑기였던 2024년이 지나고 2025년이 시작되었다. 한국영화 산업은 어떤 돌파구를 마련했을까? 영진위가 발표한 ‘2025년 1월 한국영화 산업 결산’ 보고서를 살펴보자. 이 보고서를 요약하면 “1월 극장은 한국영화가 주도, 한국영화 매출액 45.1% 상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언뜻 보면 역시나 ‘한국영화가 잘 나가고 있구나’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나마 한국영화가 조금 약진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지난해 연말 개봉한 ‘하얼빈’이 그나마 선전 아닌 선전을 했기 때문이다. ‘히트맨2’(254만 명)의 흥행은 조금 의외긴 했지만 ‘검은 수녀들’(167만 명)은 예상보다 저조했다.
“극장은 매주 토요일 숫자 적힌 공을 뽑는 복권 추첨과 같다. OTT는 정해진 소정의 수익을 보전하며 제작사를 돌아가게 만들 수는 있다. 솔직히 말해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포맷으로 영화를 보든 관계가 없다. 단지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주길 바랄 뿐이다.”
1월은 설 연휴가 포진되어 있는 성수기로 여느 때 같으면 연휴를 노린 텐트폴(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매우 큰 규모로 만든 영화), 블록버스터 등이 개봉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에는 그런 라인업이 거의 없다. 한국영화는 정말로 전성기를 놓쳐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상황은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영화를 좋아했고, 사랑했던 관객으로서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는 게 어쩌면 노스탤지어로 남을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은 전통 미디어가 명을 다하고, 뉴미디어에 바통을 넘겨주는 과도기가 아닐까.
여기서 전통 미디어는 TV와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다. 일단 TV는 드라마와 예능이라는 자신들의 주요 레퍼토리를 OTT 플랫폼과 유튜브로 이관하고 있다. TV는 일단 그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보인다. 언제나 주도권을 장악할 것만 같던 TV 채널들이 모바일 기기 속에 있는 포털과 OTT, SNS 등 온라인 플랫폼에 주도권을 빼앗긴 지 오래다. 이런 와중에 영화는 극장이라는 자신들의 플랫폼을 지켜보려 애를 쓰고 있다. 아이맥스라는 제작 포맷을 강조하고 모바일과 TV로는 체험할 수 없는 웅장한 사운드와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극장용 영화를 보라고 어필한다.
하지만 팬데믹은 인간의 인지구조를 모바일 디바이스에 최적화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기성 세대 역시도 유튜브와 OTT 이용률이 높아졌다. 새로운 세대는 두말할 필요 없다. 이제 극장과 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은 옛말이 된 듯하다. 극장 입장료가 비싼 탓도 있지만, 굳이 제한된 공간에서 재미가 있든 없든, 하나의 콘텐츠에 몰입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번거롭게 되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스펙터클이라는 판타지로 포장하는 시대는 저물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라는 미디어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보는 방식과 환경이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 영화들이 제작 스튜디오와 극장 간의 결탁에 의해 극장에서 보여졌던 것처럼, 지금의 영화들은 스튜디오와 OTT의 합작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에서 상영되는 것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괴리는 생긴다. 애초 영화는 제작, 투자, 배급이라는 프로세스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1차 수익 환원은 극장에서, 2차 수익은 IPTV, 스트리밍, OTT 등을 통해서 창출해왔다. 극장을 포기하면 익명의 대중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수익 역시 사라진다. 이게 산업적 딜레마다.
한국영화는 지금 전통 방식을 고수하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한 편의 영화 흥행은 시쳇말로 로또 당첨에 비유되곤 했다. 극장을 통한 1차 수익이 사라지면, 그런 잭팟은 영원히 존재할 수가 없다. 극장은 매주 토요일 숫자 적힌 공을 뽑는 복권 추첨과 같다. OTT는 정해진 소정의 수익을 보전하며 제작사를 돌아가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니 이제 한국영화 산업은 일종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전통을 다시금 부활시키기 위해 어떤 타협점을 창출하든,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던가’의 둘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포맷으로 영화를 보든 관계가 없다. 그러니 관객을 위해 극장을 살려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단지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 영화가 다시 K-콘텐츠의 중심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이주영(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사진 픽사베이, 게티이미지뱅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8호(25.05.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