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 문제아 '존 갈리아노'는 어떻게 전설이 되었나 [박소현의 옷장과 책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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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갈리아노 / 사진. ©Szilveszter Makó

존 갈리아노 / 사진. ©Szilveszter Makó

올해 봄은 존 갈리아노와 자라(ZARA)의 만남이라는 변화의 꽃을 심는 첫 삽이 떠졌다. 대중의 이목을 끌던 꽃바람이 잦아든 지금에서야 갈리아노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압화를 하듯이 활자를 꾹꾹 눌러 담아 본다.

그는 참 인복이 많으면서도 개똥밭에 구르는 실수를 했던 젊은 날을 보냈다. 내일모레면 곧 70살이 되는 1960년생 디자이너 때문에 아직도 패션계가 들썩이는 데는 다 그럴만한 재능과 사연이 있다.

그는 영국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함과 동시에 런던 최고의 편집숍 브라운스(Browns)에 졸업 컬렉션이 통째로 매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전부가 아닌 사업의 세계에서 갈리아노는 두 번이나 파산한 사장님이 되었다.

존 갈리아노 / 사진. ©Szilveszter Makó

존 갈리아노 / 사진. ©Szilveszter Makó

갈리아노의 재능과 인복은 이때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안나 윈투어와 앙드레 레옹 탈리로 하여금 그를 지원하게 만든다. 이후에 그는 영국인 최초로 프랑스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LVMH 그룹의 크리스찬 디올에 입성하기에 이른다.

디올에서 그의 재능만큼 인복은 더욱 빛을 발했는데, 바로 니콜 키드먼과 사라 제시카 파커 덕분이었다. 니콜 키드먼은 1997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당시 남편이었던 톰 크루즈를 넘어서는 존재감을 보여준 올리브색 드레스,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은 시상식 트로피 같았던 골드 드레스를 입고 슈퍼스타가 된다. 사라 제시카 파커는 ‘캐리 신드롬’을 몰고 온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디올의 바이어스 컷 슬립 드레스, 말 안장을 본뜬 새들 백, 자도르 티셔츠를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이어서 갈리아노는 영국에서 CBE(대영 제국 3등 훈장)까지 받게 된다.

 존 갈리아노>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다큐멘터리 <High & Low: 존 갈리아노>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두 번이나 파산했던 갈리아노의 사장님으로서의 미흡함과 넘치던 인복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혼자서는 ATM 기계를 사용할 줄도 모를 지경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지만, 감당해야 했던 컬렉션은 1년에 수십 개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을 함께 소화했던 그의 오른팔 스티브 로빈슨이 2007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등지자, 갈리아노는 무너져 버렸고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다.

2011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갈리아노의 유대인 비하 발언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갈리아노 스스로 누울 자리를 보지도 않고 개똥을 뿌리고 그 위를 뒹굴어 댄 사건이다. 착한 사람도 미친 듯이 분노하게 만드는 ‘발작 버튼’이 있다면 바로 부모님 욕일 것이다. 그런데 갈리아노는 그 버튼을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마냥 여러 차례 눌러버렸다.

당시 그는 디올의 얼굴이었고, 디올의 CEO였던 시드니 톨레다노와 디올의 모델이었던 나탈리 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갈리아노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고 변호인단을 선임해 버린다. 그러자 그가 유대인 비하를 했을 당시에 사람들이 촬영한 동영상이 등장한다. 동영상에는 ‘히틀러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가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히틀러를 찬양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 디올은 갈리아노를 해고해야만 했다.

존 갈리아노는 영화 제작 과정 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에 응했다. 감독 Kevin Macdonald는 첫 번째 인터뷰에 대해 “6시간 동안 이어졌고, 마치 고해성사 같은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Nicholas Matthews

존 갈리아노는 영화 제작 과정 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에 응했다. 감독 Kevin Macdonald는 첫 번째 인터뷰에 대해 “6시간 동안 이어졌고, 마치 고해성사 같은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Nicholas Matthews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벌금을 내고 재활 치료에 들어간다. 이후 그의 인복이 다시 격하게 발동한 적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 인복이었다. 2013년 한 언론사에서 갈리아노가 유대인을 조롱하는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미국의 유대인 비정부기구인 ADL의 에이브 폭스먼 국장이 성명까지 발표하며 갈리아노를 옹호했다. 국장은 갈리아노가 그의 과오로부터 달라지기 위해서 유대계 공동체와 학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속죄하고 있다고 두둔했으며 언론사를 나무랐다.

 존 갈리아노> 스틸컷. 존 갈리아노가 2011년 이후 처음으로 디올 아카이브를 다시 찾고, 패션 하우스 관계자들과 재회하는 모습 / ©Nicholas Matthews

다큐멘터리 <High & Low: 존 갈리아노> 스틸컷. 존 갈리아노가 2011년 이후 처음으로 디올 아카이브를 다시 찾고, 패션 하우스 관계자들과 재회하는 모습 / ©Nicholas Matthews

같은 해에 케이티 모스는 갈리아노에게 손을 내민다. 바로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인복이 또 내려온다. 이탈리아의 OTB에서 그에게 메종 마르지엘라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OTB는 메종 마르지엘라 외에도 디젤, 마르니, 빅터앤롤프, 질 샌더까지 보유한 패션 그룹이다.

하지만 셀럽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것과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디자인을 맡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때 또 한 번 안나 윈투어가 나서서 갈리아노를 위한 여론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틴 마르지엘라 또한 갈리아노가 디자인을 맡는 것에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도 차가운 심장을 가진 경영진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까.

OTB의 창업자는 렌조 로소 / 사진=한경DB

OTB의 창업자는 렌조 로소 / 사진=한경DB

먼저 OTB의 수장은 마그마에 가까운 심장을 가진 이이다. OTB는 'Only The Brave(용기 있는 자들의 연대)'의 약자다. 그리고 당시 갈리아노를 영입하기 위해서 나섰던 OTB의 창업자는 렌조 로소, 럭셔리 데님 브랜드 디젤을 만든 이였다. 갈리아노를 영입하는 것에 대해 마르지엘라에게 직접 물어본 이도 렌조 로소였다.

드디어 그의 개똥밭 위에 레드카펫이 깔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멋진 10년을 보낸 메종 마르지엘라와 2024년 작별을 고하고 다시금 자라와 계약한 그를 보고 있자면, 왠지 그가 죽는 날까지 옷을 만들었던 가브리엘 코코 샤넬처럼 살고 싶은 건 아닐까 싶다. 인생이 진창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단 한 명이라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존 갈리아노는 증명해 준다.

 존 갈리아노>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다큐멘터리 <High & Low: 존 갈리아노>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을 대신해서, 개똥밭에서 굴러도 함께 구를 사람이 있다면 꽃을 피워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깍쟁이들만 있을 것 같은 패션계도 사람 사는 곳이라서 사람 냄새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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