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에 가려진 추상화 선구자인가, 그저 묵묵하게 예술에 마음을 다한 예술가인가, 아니면 종교에 심취해 캔버스에 계시를 담는 매개자였던가. 어쩌면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화가인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이 부산 을숙도에 상륙했다. 감동하거나 비판하거나. 해석은 오롯이 당신의 눈에 달렸다.
2018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한 여성 화가의 전시에 60만 명이 몰려들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꽃처럼 펼쳐진 기하학적 형상과 선명한 색채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발걸음을 멈췄다. 곳곳에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뉴욕 화단은 “이전에 본 적 없던 회화”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이 작품들은 이듬해 런던과 파리, 베를린 등 유럽 주요 도시를 돌며 1000만 명의 미술애호가들을 끌어모았다.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킨 주인공이 한창 떠오르는 신예가 아니라,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서 추상을 시도했던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화가의 이름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 대다수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여성이었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앞섰다
지난 100년의 미술사는 구상을 넘어 추상의 영역에 도달한 화가로 칸딘스키와 피에트 몬드리안을 꼽았다. 칸딘스키가 스스로의 ‘완전 추상화’를 그린 시점은 자신의 그림을 받아주지 않는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한 뒤 프란츠 마르크 등과 청기사파를 결성해 전시를 열 무렵인 1911년. 몬드리안이 명확한 수직, 수평선만 남긴 채 캔버스에 모든 요소를 지워버린 시점은 무질서로 가득 찼던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즈음이다. 반면 아프 클린트가 자신의 첫 추상 작품으로 평가되는 ‘태초의 혼돈’을 그린 시기는 1906년으로 두 거장을 분명 앞선다.
미술사를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미국과 유럽 미술계가 아프 클린트에 열광하고, 그의 그림이 아시아까지 소개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앞서 추상화를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을 여태 아무도 몰랐다는 점이다. 독일의 미술사가인 율리아 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역사가 생겼다. 시장에도 없고, 보관 작품도 없는 한 여자를 중심으로”라고. 종종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진리가 바뀌듯, 미술사도 다시 쓰여야 한다는 뜻이다.
왜 아무도 몰랐을까
그림은 존재하는데, 왜 아프 클린트의 이름은 지워졌던 걸까. 그 이유 역시 간단하다. 미술사란 게 원래 편협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미술’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쌓았지만, 대체로 그간의 미학과 담론은 서유럽·백인·남성의 시각에서 전개됐다. 이 단선적인 구조에 편입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배제되고 잊혔다. 아프 클린트는 귀족 가문에서 나고 자란 백인이었지만, 주류 미술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예술의 중심지인 서유럽이 아닌 ‘변방’ 스웨덴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들은 예술이 아닌 삽화나 작은 풍경이나 그려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미술관에서 변변한 개인전 하나 열 수 없었으니 기억될 수 없었다.
아프 클린트 스스로가 자신의 서사를 감춘 탓도 있다. 아프 클린트는 1908년 독일의 저명한 신지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자신의 추상 연작을 보여줬다. 모든 종교와 사상, 철학, 인종이 구별 없이 평등하다고 본 신지학 운동을 이끈 만큼, 자신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것이란 기대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슈타이너가 “앞으로 50년간 누구도 이 그림을 봐선 안 된다”는 충격적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감히 여성이 도발적인 그림을 그려서였는지, 당시 인식으론 추상화를 인정할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프 클린트는 19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작품을 숨겼고, 또 사후 20년간 추상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어떻게 다시 빛을 되찾았나
21세기를 전후한 동시대 미술의 화두를 꼽으라면 숨겨진 미술사의 재발견이 거론된다. 보다 총체적으로 미술사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유럽의 주류 미술사 줄기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장은 2023년 아프 클린트를 다룬 영화 ‘힐마 아프 클린트: 미래를 위한 그림’이 국내 개봉했을 당시 한국을 찾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산물로서 예술은 더 발굴할 게 많아요. 배타적이고 천재적인 것만 추구하는 그런 서술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여성이 주목받고, 미국과 아프리카의 흑인 미술이 두각을 드러내는 미술계 흐름이 여기서 출발한다.
아프 클린트의 그림이 조명된 것도 잊힌 미술사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단초다. 그의 그림은 1986년 일부 작품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전시에 출품돼 세상에 나왔다. 2013년 고국인 스웨덴 스톡홀름현대미술관이 ‘추상미술 개척자’라는 제목을 달고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북유럽에서 차츰 그의 이름이 회자됐고, 독일을 거쳐 뉴욕까지 상륙하게 된 것이다.
을숙도 상륙한 아프 클린트의 추상
아프 클린트에 대한 열기는 2020년대 들어 아시아까지 옮겨붙는 분위기다. 지금 부산 을숙도를 가면 그의 대표작을 직접 볼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전시가 열리면서다. 앞서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전시를 잇는 순회전이다. 아프 클린트의 예술을 한국에서 본격 소개되는 첫 전시라 의미가 크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 대다수를 관리하는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과 협력해 진행되는 터라 회화부터 드로잉 기록 등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작품이 139점이나 소개됐다.
나선이 소용돌이치는 형태가 돋보이는 ‘태초의 혼돈’을 비롯해 아프 클린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10점의 대형 회화’ 연작 등 주요 작품이 모두 걸렸다. 10점의 대형 회화는 유년시절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인간 생명의 흐름과 의식의 진화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집약돼 있다. 세로 3m가 넘는 거대한 크기에 압도된다.
지금껏 유수의 미술관에서 열렸던 아프 클린트의 전시과 결이 다른 게 특징이다. 풍경화 등을 그린 구상회화에서 시작해 추상화 세계에 진입하는 작가의 작업세계 변화 과정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연대기식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추상의 틀 안에서도 시기마다 무엇에 관심을 가졌고 질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구성이 특징이다. 강승완 부산현대미술관장은 “아프 클린트 재단에서 전시 준비를 마친 후 ‘가장 아름다운 전시 구성’이라고 엄지를 들어올리고 갔다”고 말했다.
‘추상 선구자’ 신화의 함정 경계해야
최근 미술계가 아프 클린트를 ‘추상의 시작점’으로 되돌려놓으려는 움직임에 열중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분명히 있다. 예술은 자유롭고 해석은 보는 이의 몫이라는 전제를 잊어선 안 된다. 주류 미술사의 반작용으로 터져 나온 아프 클린트의 ‘추상화 선구자’라는 신화적 파도에 휩쓸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아프 클린트가 가장 앞선 시기에 순수 추상에 가까운 회화를 남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회화적 언어가 과연 이론적으로 체계적이고, 수학적이나 기하학적 질서에 기반한 20세기 추상미술에 영향을 줬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프 클린트는 신지학과 영매술에 심취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생전 참여했던 강령회 모임에서 신적인 존재로부터 그 가르침을 담은 그림을 그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종의 ‘메신저’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계시를 시각화 했고, 그의 그림은 예술보단 종교적 언어에 더 가깝다.
이런 점에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회화적 이론을 담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란 책을 낸 칸딘스키나, 자신의 그림을 ‘신조형주의’로 규정한 몬드리안과는 아프 클린트는 자못 이질적이다. 아프 클린트의 그림 속 모호한 상징체계나 비밀스러운 숫자 등은 회화적으로 통용된다기 보단, 사적인 기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부산 전시를 기획한 최상호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사실 외에 회화적 완성도 등의 가치는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커다란 간판 속에 아프 클린트의 다른 예술적 시도가 묻히는 게 아닌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마치 수행자처럼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신중히 대했던 태도나, 자연에 관한 관심과 관찰이 드러나는 풍경화 등의 작업들이 종종 묻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 클린트의 식물에 대한 관찰과 사실묘사는 사물의 재현이라는 당대 유행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만 하다.
예술은 자유롭게 감상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수년 새 미술계는 ‘최초’, ‘여성’, ‘추상’, ‘선구자’, ‘재조명’이라는 틀 속에서 아프 클린트를 읽어 왔다. 클린트는 재발견돼야 마땅하지만, 어쩌면 동시에 재고돼야 할 예술가다. 단순히 ‘누가 먼저였나’를 따지는 연대기 게임 대신 그의 예술이 동시대 미술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아프 클린트 재단을 중심으로 지난 수 년간 전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쉴 새 없이 이어졌던 전시가 부산을 마지막으로 한 동안 휴식에 들어간다는 소식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부산=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