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바나나 없는 바나나맛… 우린 종종 삶을 흉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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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성해나 작가 신작
진짜-가짜 경계 예리하게 포착
현대인 심리 그려낸 블랙코미디
◇혼모노/성해나 지음/368쪽·1만8000원·창비


박수무당 경력 30년 차에 돌연 신기(神氣)를 잃어버린 주인공 문수. 신기 들린 연기를 하면서 애써 ‘니세모노(にせもの·가짜)’ 처지를 부정하는 그의 앞집에 에코백에 무령을 매단 ‘신애기’가 이사 온다. 문수는 앳된 무당을 업신여기지만, 신애기는 이내 오금이 저리게 하는 눈빛으로 독침을 쏜다.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혼모노’)

“바나나맛이 나지만 바나나는 아닌 우유.”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놓인 것들로 가득한 오늘날의 세태를 예리하게 포착한 단편들이 수록된 책이다. 저자는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뒤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을 펴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표제작을 비롯해 대규모 집회 한복판에서 혼란을 겪는 재미교포를 그린 ‘스무드’ 등 블랙코미디 같은 소설 7편이 담겼다.

수록작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누가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면 당황하며 마블… 정도를 꼽고, 멜론 순위권에 있는 노래만 듣던” 평범한 주인공이 문제적인 영화감독의 팬클럽에 가입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취향이랄 게 별로 없다가 논란이 많은 감독의 열렬한 팬이 된 주인공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맹목적 팬으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심리적 혼란 등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잉태기’는 임신한 딸을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가한 성년의 딸에 대한 엄마와 할아버지의 과도한 애정 혹은 집착은 원정출산을 하느냐 마느냐부터 사사건건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을 향해 가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딸의 목소리는 소외된다.

개성 넘치면서도 핍진성 높은 서사와 등장인물은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여러 문제를 반추하게 만든다. 이야기 속 허구와 진짜 세상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간명한 문체를 타고 빠르게 질주하던 이야기가 은유하듯 따끔한 문장으로 매듭지어질 때 독자의 마음에 “펑, 무언가 터지던 순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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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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