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 몰라 재개발 못해요"…부산 '공포의 아파트'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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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 위험 > ‘붕괴 위험’ 안내판이 붙어있는 부산 영주동 시민아파트. /부산=민건태 기자

< 붕괴 위험 > ‘붕괴 위험’ 안내판이 붙어있는 부산 영주동 시민아파트. /부산=민건태 기자

해 질 녘엔 부산의 관광명소 감천문화마을을 닮은 것 같았는데 낮에 보니 완전히 착각이었다. 25일 부산시 영도구와 중구, 동구 일대의 좁은 언덕길을 오르자 다섯 집 건너 한 집꼴로 빈집이었다.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방치된 빈집들 때문에 동네 전체가 실제보다 훨씬 더 쇠락해 보였다. 한두 집씩 늘어난 빈집에 주거환경이 나빠지자 이를 못 견딘 주민들이 동네를 떠나면서 빈집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진 결과다.

주민 대부분이 떠난 영주동 시민아파트에는 ‘붕괴 위험’ 경고판이 붙었지만 소수의 주민은 여전히 빈집들 틈에서 위태롭게 살고 있었다.

과거 부산시청이 있어서 ‘원도심’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한때 부산의 중심이었다. 경사가 급하고 골목이 좁은 탓에 차량 진입조차 쉽지 않아 재정비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성태 부산시 건축주택국장은 “이 지역에만 6000여 채의 빈집이 있는데 70% 이상이 무허가 주택”이라고 말했다.

농어촌 지역 문제로 치부하던 빈집 문제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다음주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처음으로 빈집 종합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무섭게 번지는 '대도시 빈집'…집주인 몰라 재개발도 못한다
전국 빈집 13만채 중 도시 5.9만채…인근 지역 주택값 하락 부르기도

< 무너진채 방치 > 부산시 동구 산복도로 일대의 빈집들이 방치돼 있다. /부산 동구청 제공

< 무너진채 방치 > 부산시 동구 산복도로 일대의 빈집들이 방치돼 있다. /부산 동구청 제공

전국의 빈집은 총 13만4055채(2024년 기준)로 추산된다. 이 중 41.7%인 5만5914채가 도시 지역에 몰려 있다. 부산이 1만1432채로 가장 많고 서울도 6711채나 있다. 그 뒤를 대구(6009채) 대전(4991채) 인천(4178채) 등이 잇는다. 대도시도 빈집 문제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은 2050년 한국 전체 주택의 7.8%가 빈집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깨진 유리창 효과’로 도시 기능 악화

빈집 문제가 심각한 건 방치하면 빈집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치안과 위생 환경을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원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특히 주택이 밀집한 도시 지역에서는 빈집이 한 번 생기면 ‘깨진 유리창 효과’로 순식간에 늘어나 전체 도시 기능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부산시 원도심에 6000여 채, 인천 미추홀구에 600여 채의 ‘빈집촌’이 형성된 배경이다.

빈집 증가는 주택 가격을 떨어뜨려 경제적 손실로도 이어진다. 일본은 도심에 빈집이 늘자 지역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 2019년부터 2023년 사이에 3조9000억엔(약 39조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파트는 더 손을 쓰기 힘들다. 관리비와 장기수선적립급 납부가 끊기며 아파트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재건축하려고 해도 소유자가 불분명해 주민 동의를 확보하지도 못한다.

부산의 빈집 밀집 지역 사례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재개발을 원하지만 사업 주체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은 손사래를 친다. 산비탈에 고도 제한까지 겹친 입지적 한계 때문에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강정규 동아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소유권이 불확실한 문제까지 겹쳐 부산 원도심 재개발도 산 아래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남은 선택은 고쳐 쓸 수 있는 빈집을 리모델링 등으로 재정비하고 붕괴 위험이 있는 빈집은 철거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빈집 실태조사에서 최하등급(4등급) 판정을 받은 빈집을 철거할 수 있지만 막상 집행하려면 쉽지 않다. 빈집 상당수를 차지하는 무허가 주택은 관련 법상 빈집에 포함되지 않아 철거할 법적 근거가 없어서다.

예산도 부족하다. 행정안전부가 올해와 내년 100억원씩 철거비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1년에 1500채 정도를 철거할 수 있는 액수다.

◇관계 부처 첫 종합대책

빈집 공포…어느새 도심까지 파고들었다

정책 담당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건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빈집 문제는 도시 지역은 국토교통부가, 농어촌 지역은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가 나눠 맡았다. 그러다 보니 빈집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었다. 농어촌 빈집에 적용하는 ‘농어촌정비법’은 무허가 주택을 빈집에 포함하는 반면, 도시 지역에 적용하는 ‘빈집 및 소규모주택정비법’은 무허가 주택을 포함하지 않는 식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다음주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범정부 종합 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은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행안부 국토부 농식품부 해수부 등으로 구성된 관계 부처 ‘빈집 정비 태스크포스(TF)팀’은 법령 정비, 통계 기준 통일, 예산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종합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TF는 우선 도시와 농어촌에 다르게 적용되는 빈집 관련 법령을 정비해 정부 공식 통계를 작성할 방침이다. 지자체에 철거 예산을 지원하는 법적 근거도 마련한다. 빈집을 철거하더라도 일정 기간 토지세 대신 주택세를 부과하는 세제 혜택도 줄 방침이다. 현재는 빈집을 철거하면 나대지에 주택세보다 훨씬 비싼 토지세를 물리기 때문에 철거를 기피하게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영국과 일본 일부 지역이 시행하는 빈집세(빈집을 방치한 소유주에게 과세하는 제도)는 당분간 도입하지 않을 방침이다.

부산=민건태 기자/정영효/이광식 기자 mink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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