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한국·대만 아시아 반도체 벨트 조명
‘관심 못받던’ 메모리, 공급난에 대우 달라져
韓 테크기업, 사상 첫 2개 ‘시총 1조 달러’
핵심공급망 모두 동아시아 화약고 옆에 있어
이달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컴퓨터 박람회 컴퓨텍스(Computex)의 주인공은 엔비디아(Nvidia)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었다.
록스타 같은 인기를 누리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셀카와 사인 요청을 소화하던 그는 한 부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엔비디아의 핵심 공급망 중 하나인 한국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의 전시관이었다.
황 CEO는 그 자리에서 마커를 들고 최첨단 AI 슈퍼컴퓨터의 필수재이자 극심한 공급 부족을 겪고 있는 메모리 웨이퍼 위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제발 더 만들어주세요(Please make more).”
장난 섞인 요청이었지만, 이는 현재 글로벌 테크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관통하는 ‘반(半) 진담’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전 세계 테크 거물들이 AI 데이터 센터 구축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는 가운데, AI 시스템을 구동하기 위한 반도체칩의 수요는 이미 공급 속도를 아득히 앞지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루했던 산업’의 반전… ‘시총 1조 달러’ 클럽 속속 진입
이 무서운 투자 붐은 한때 엔비디아를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장 기업으로 밀어 올린 데 이어, 이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아시아의 반도체 후방 기업들까지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데이터 센터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필수 부품을 만들어온 ‘숨은 공신’들이 막대한 낙수효과를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
티모시 아큐리 UBS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과거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지루한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인프라가 됐다”며 “이 기업들은 지금 성장의 철로를 깔고 있으며, 앞으로 수년간 그 철로 위에서 엄청난 상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AI 골드러시’는 글로벌 기술 권력의 지도를 전면 재편하고 있다.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AI 프로세서뿐만 아니라, 이 방대한 데이터를 잠시 머금고 있어야 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의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최첨단 메모리 공급망의 정점에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대만에 선단 공장을 둔 미국의 마이크론 단 세 기업만이 존재한다.
반도체 열풍의 파급력은 숫자로 증명된다. 2026년 들어 한국 코스피 지수는 약 두 배 가까이 폭등하며 전 세계 주요 시장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대만 가권지수 역시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동반 질주로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고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500조 원)가 넘는 테크 기업을 동시에 2개 이상 보유한 첫 번째 국가’ 반열에 올랐다. 마이크론 역시 시총 1조 달러 클럽에 무난히 안착했다.
20년 전 스마트폰 붐과의 이면… ‘차이나-프리(China-free)’ 공급망의 명과 암
NYT에 따르면 이번 AI 하드웨어 붐은 20년 전 스마트폰이 이끈 붐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삼아 포용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을 거대한 기술 라이벌로 키우는 부메랑이 됐다.
그러나 이번 AI 광풍에서 중국은 철저히 소외(China-free)되어 있다. 미국의 강력한 관세 장벽과 첨단 기술 수출 규제가 베이징을 엔비디아 중심의 초고속 AI 서버 공급망 바깥에서 꽁꽁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워싱턴이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며 자국 내 제조업 부활을 노렸던 것보다, 시장의 AI 붐과 규제의 시너지가 하룻밤 사이에 더 강력한 중국 배제 효과를 낳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중국과의 합작법인이나 엔지니어 유출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한국과 대만 기업들은 이제 독자적인 AI 글로벌 공급망의 주역으로서 막대한 과실을 수확하고 있다.
낙수효과는 칩 제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데이터센터가 뿜어내는 엄청난 열을 식혀야 하는 액체 냉각 장치, 전력 변환기 분야에서도 대만의 델타 일렉트로닉스(Delta Electronics) 같은 기존 부품사들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폭스콘(Foxconn)과 콴타(Quanta)는 중국 대신 멕시코와 동남아, 대만 현지에서 AI 서버를 조립하느라 분주하다.
보너스 잔치와 전용기 격납고… 그럼에도 남는 ‘지정학적 리스크’
호황의 열기는 현장 직원들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임직원들이 역대급 실적 연동 보너스를 챙기면서, 국내선 외제차 구매 붐과 통근 셔틀버스 노선을 중심의 아파트 매수세가 외신에 조명되기도 했다. 심지어 결혼 정보 시장에서 삼성 직원의 부부 가치를 의사나 변호사 수준으로 평가한다는 이색 지표까지 등장했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위치한 마이크론 본사에는 임원 전용기와 격납고를 포함한 대규모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물론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월가의 높은 기대치를 밑돌지 모른다는 우려에 반도체 주가가 일시적으로 요동치자, 타이베이와 서울의 투자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과거의 극심한 ‘다운사이클(불황기)’을 기억하는 엔지니어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제발 돈을 더 주세요 (Please pay more).”
황 CEO의 사인 웨이퍼 앞에서 SK하이닉스의 한 현장 엔지니어가 던진 이 농담 섞인 대답은 호황의 이면에 숨은 시장의 팽팽한 긴장감을 대변한다.
NYT는 가장 큰 숙제로 지정학적 위험을 꼽핬다. 핵심 기술의 설계는 미국이 쥐고 있지만, 실제 제조 공장과 핵심 공급망은 중국과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화약고를 이웃으로 둔 대만과 한국에 쏠려 있다.
젠슨 황의 친필 사인이 담긴 그 웨이퍼는 조만간 한국 SK하이닉스 본사 벽에 액자로 걸릴 예정이다. 먼 훗날 이 웨이퍼가 역사적인 AI 대호황의 자랑스러운 기념품으로 기억될지, 아니면 순식간에 꺼져버린 기술 버블의 잔해로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두 지역을 기반으로 ‘중국이 배제된 세계 최첨단 AI 공급망’이 완전히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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