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고 나와서 계속 'No.1'만 부르고 있다."
관객수 500만을 돌파하며 여름 극장가의 흥행 복병으로 떠오른 '좀비딸'을 본 이들 사이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영화에서는 가수 보아의 히트곡 'No.1'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극 중 중학생 딸인 수아(최유리 분)가 댄스 경연대회 출전곡으로 택한 이 곡은 아빠 정환(조정석)도 노래와 안무를 꿰고 있다. 23년 전인 2002년 발매된 'No.1'이 부녀지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그 역할을 톡톡하게 해냈다. 나아가 관객들의 향수까지 자극하면서 음원차트 역주행도 불러일으켰다.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는 "좀비딸 보고 바로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초등학생 때 MP3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 구관이 명관"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잊고 지냈던 시간을 다시금 꺼내 보게 되는 '음악의 순기능'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음원 일간 순위가 400위권까지 오르기도 했다.
올해는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가요기획사 최초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해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의미가 남다르다. 1995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된 SM은 H.O.T., S.E.S. 등을 선보이며 한국형 '아이돌 시스템'을 처음 세상에 내놨고, 보아를 필두로 'K팝 한류'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엑소, 레드벨벳, NCT, 에스파, 라이즈, 하츠투하츠 등을 끊임없이 선보이며 K팝 인기를 주도했다.
한국의 주요 4대 기획사(SM, 하이브,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중에서도 가장 어른으로 꼽히는 SM의 철학은 최근 유독 돋보인다. 음악이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아이돌 시장'의 특성 안에서도 IP(지식재산권) 생명력을 늘리며 가치를 꾸준히 보존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보아는 데뷔 25주년이 된 올해 정규앨범을 발매했고, 20주년을 맞은 슈퍼주니어는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고 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데뷔 18년 차 샤이니도 지난 5월 다 함께 뭉쳐 콘서트를 개최했고, 멤버 키는 최근 솔로로 컴백해 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고는 눈물을 흘렸다. 10년 차가 된 NCT도 하나둘 솔로로 나서며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때는 '마의 7년'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K팝 그룹이 해외 팬덤을 갖추고 성장세를 이어가는 최근 흐름에서는 7년 이상의 활동을 필수적으로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가운데 'K팝의 영속성'을 잃지 않고 있는 SM의 행보는 30주년을 맞은 해에 더 뜻깊게 다가온다. 이 밖에도 컨템포러리 알앤비 레이블 크루셜라이즈를 통해 개성 있는 아티스트를 선보이고, SM클래식스에서 K팝과 클래식의 결합하는 시도를 하는 등 장르 확장과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다른 엔터 기업 CJ ENM 역시 올해 서른이 됐다. 음악·영화·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CJ ENM은 1995년 음악 전문 채널 엠넷(Mnet)을 개국해 다채로운 콘텐츠를 선보여 왔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엠넷의 여러 프로그램은 국내 대중문화 흐름에 주요한 변화를 주곤 했다. '슈퍼스타K'는 방송 오디션의 활로를 열었고, '쇼미더머니'·'고등래퍼'는 전례 없던 힙합 붐을 일으켰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는 그늘에 가려져 있던 댄스 신을 조명했다는 평과 함께 K팝 댄서들의 권리를 끌어올렸다. 세계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제작진은 '스우파'를 통해 리정을 접하고 그에게 안무 제작을 제안하기도 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으로는 아이오아이·워너원 등을 탄생시키며 역대급 흥행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프로그램의 근간을 흔드는 '투표 조작' 논란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치솟는 K팝 글로벌 인기에 음악 사업은 CJ ENM 내에서 영향력을 더 키워갔다. 절치부심해 다시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보이즈플래닛' 출신 제로베이스원, '아이랜드2' 출신 이즈나가 레이블 웨이크원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더블 밀리언셀러(음반 200만장 이상 판매) 아티스트인 제로베이스원과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밀리언셀러 그룹 INI가 활약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보이즈2플래닛'으로 새로운 보이그룹 출격까지 앞두고 있다. 프로그램 화제성과 함께 출연자 투표를 진행하고 있는 자체 플랫폼 엠넷플러스도 일간 활성 사용자 수(DAU)가 146만명을 돌파하는 등 연쇄 효과를 보고 있다. 한 차례 밀어주기 의혹이 불거지며 주춤했지만, 이 같은 공정성 논란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제2의 제로베이스원 탄생을 기대해 볼 만하다.
아울러 올해는 30년 명맥을 이어온 음악 채널로서의 가치를 공고히 할 전망이다. 새로운 포맷보다는 기존의 것을 최대한 살리는 전략이다.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가 부활하며, 2018년 이후 7년 만에 홍콩에서 열리는 'MAMA 어워즈'에도 기대가 쏠린다. 5만석 규모의 홍콩 카이탁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올해 'MAMA 어워즈'에는 30년간 축적해온 글로벌 음악 사업 노하우와 무대 기술력이 집약될 것으로 예상된다.
CJ ENM 문화사업 인력들이 힘을 보탠 애플TV '케이팝드(KPOPPED)'도 주목받고 있다. '케이팝드'는 미국의 전설적인 팝스타 라이오넬 리치와 이미경 CJ 부회장이 2021년 처음 기획하고 총괄 제작을 맡았다. 여기에 신형관 CJ ENM 음악콘텐츠본부장, 홍준기 전략추진담당, 김기웅 PD 등이 참여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K팝이 전 세계가 향유하는 장르라는 인식이 생겨난 가운데, 유수의 팝스타가 참여하는 해당 프로그램이 K팝의 확장성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린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