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곡 '언셀렉티드…'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초연
국악에 대한 편견 깨 갈채
임윤찬이 연주한 '라운드…'
"우주 유영하는 느낌" 호평
기존 악기 규범·규칙 벗어나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 제시
공연장 밖 로비 분위기는 관계자들이 공연의 성패와 관객 만족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19세 작곡가 이하느리가 잇따라 내보인 신작 초연 현장은 커튼콜은 물론 공연 후 로비 분위기에서도 '대박'의 기운이 흘렀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천재'라고 극찬한 친구, 2023년 헝가리의 버르토크 국제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여러 악단과 연주자의 러브콜을 받는 신세대 작곡가를 향한 박수갈채가 뜨겁다.
먼저 지난달 26일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장단의 재발견' 공연이 끝난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로비가 그랬다. 이하느리 신작 '언셀렉티드 앰비언트 루프스 25-25(Unselected Ambient Loops 25-25)'를 놓고 삼삼오오 관객들이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관객들과 함께 연주를 본 이하느리가 로비로 나오자 그의 팬 사인회인 양 사진 한 장이라도 남기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과연 이번 연주는 국악관현악은 낯설다는, 현대음악은 추상적이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한 방에 날렸다. 클래식을 전공한 10대 작곡가가 국악을 소화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던 의심 어린 시선은 연주가 진행될수록 '국악관현악이 이런 소리도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새 지평으로 옮겨간 듯했다.
총 7악장으로 구성된 40여 분 분량의 곡은 서양식 큰북(베이스드럼)의 소리를 고조시키며 악기들의 리듬과 음향을 쌓아간다. 평소 클래식뿐 아니라 앰비언트 등 다양한 장르를 즐겨 듣는다는 작곡가의 취향 덕분인지, 작은 소리의 질감들이 공간감을 형성하며 어우러진다. 가운데 악장인 4악장은 아예 연주를 쉬는 '인터미션'으로 삽입해 4분간 무대를 암전시켰다. 관객들 속삭이는 소리, 몸 뒤척이는 소리 등 일상적 소음이 공간을 감싼다. 연주자가 4분33초 동안 가만히 있다가 내려가는 존 케이지의 유명한 '4분 33초'를 오마주한 듯했고, 7악장에선 아예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리듬이 쓰였다. 클래식, 국악, 현대음악 등 어느 장르에 갇히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긴 셈이다.
사실 음악은 수많은 약속과 규칙의 총합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가 음악의 기본으로 여겨지지만, 측정하기 어려운 배음들을 하나의 음으로 납작하게 만드는 규범, 그 음에서 벗어난 것은 '소음'으로 보는 배제가 작용한다. 악기 연주법은 어떤가. 기타는 몸으로 감싸안고 손가락으로 현을 튕긴다는 방식도 일종의 '틀'이다. '철학으로 현대음악 읽기'를 지은 박영욱 교수는 이런 점에서 "현대음악은 허구적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음의 불투명한 세계를 여행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하느리 역시 어떤 의도나 규칙을 상정하지 않는 작곡가다. 신작을 선보일 때마다 '음악으로 뭘 표현하고 싶었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지만, 그는 언제나 "어떤 방향을 갖고 쓴 건 아니다"고 답한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동안 작곡의 재료가 되는 음악적 영감을 머릿속에 모으고, 그걸 음악으로 꺼낸다고 한다. 그는 "아이디어는 소리에서 많이 얻는다"며 "어떤 소리가 재밌어서 그걸 중심으로 작업해나가기도 한다"고도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음악엔 직관이 있다. 정해진 형식을 따라 꾸며내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을 모아 펼쳐낸다는 인상을 준다. 풀벌레나 개구리 울음소리, 은은한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등이 모여 한여름 밤 시골길의 정취를 자아내듯,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 새로운 감각이 펼쳐지는 세계다. 지난해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투어의 서주로 작곡한 '라운드 앤드 벨베티 스무드 블렌드(…Round and velvety-smooth blend)'의 유튜브 공개 버전에 많은 청자가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다' '별들이 부딪친다'는 감상평을 간증하듯 써내는 이유다.
이하느리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의 성공적인 초연 후 불과 일주일 만이었던 지난 3일엔 타악기 협주곡 '애즈 이프 아이(As if…….I)'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에서 초연했다. 퍼커셔니스트 김은혜는 이날 북, 마림바 같은 일반적인 타악기 외에 기타도 연주해야 했다. '기타=현악기'라는 약속을 깨고, 탁자 위에 눕힌 기타의 현 부분을 유리컵이나 손으로 문대고 퉁기면서 새로운 소리를 냈다. TIMF 앙상블은 관현악에 더해 공중에 돌리면 바람소리가 울리는 장난감 '튜브 파이프(Whirley Tube)'도 특수악기로 연주했다.
어떤 음악 세계를 펼쳐낼지 지켜봐야 할 음악가가 또 한 명 늘었다. 그는 이달 14~15일엔 피아니스트 손민수·임윤찬의 듀오 리사이틀에서 그가 편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모음곡'이 연주된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상주 작곡가로 위촉돼 내년 상반기에도 신작을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정주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