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100억 선주문"…사상 초유 '동박의 난' 애타는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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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한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업체는 최근 대만 동박적층판(CCL) 생산업체인 EMC와 TUC 등 두 곳에 100억원어치 물량을 선발주했다. 이 업체의 평소 한 달 평균 사용 물량(15억~20억원)의 다섯 배가 넘는 규모다. 이 회사 대표는 “CCL 쇼티지(공급 부족) 우려로 일단 무더기로 주문을 내긴 했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다”며 “20년 넘게 PCB 사업을 하고 있는데 CCL이 없어 제품을 못 만드는 상황은 처음”이라고 걱정했다.

"일단 100억 선주문"…사상 초유 '동박의 난' 애타는 사장님

◇CCL 수입단가 2만달러 돌파

PCB의 핵심 소재인 CCL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수요 대비 공급이 크게 부족해서다. CCL은 절연판 위에 얇은 구리판(동박)을 입힌 판으로 PCB의 핵심 소재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자동차 등 주요 첨단 산업에서 수요가 동시다발적으로 폭증하며 공급 부족 사태가 확산한 것으로 분석됐다.

3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3월 CCL 수입 단가는 t당 2만728달러로 집계됐다. 전년 동월(1만1880달러) 대비 74.5% 상승했다. CCL 수입 단가가 t당 2만달러를 넘어선 것은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처음이다. CCL 수입 단가가 급등한 가장 큰 요인은 AI용 반도체에 들어가는 CCL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5·6세대 통신 인프라, 자동차 자율주행 시스템, 데이터센터 서버 등 산업에서도 고사양 CCL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다.

◇CCL업체 주가 고공행진

국내 CCL 공급망은 핵심 원재료인 동박 공급사(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SK넥실리스), CCL 제조업체(두산 LG화학), PCB 기판 제조업체(삼성전기 대덕전자) 등으로 구성된다. PCB는 엔비디아의 블랙웰 등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가는 고급 제품과 범용 제품으로 나뉜다. 이런 반도체용 고급 기판엔 고급 소재인 T글래스를 쓴 CCL이 사용된다. 이에 비해 국내 중소 PCB 업체는 E글래스 기반 CCL을 사용해 범용 PCB를 생산한다.

고사양 PCB 수요가 급증하고 단가가 뛰자 CCL 관련 업체가 한정된 생산라인을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속속 전환했다. CCL 수출 단가가 급등한 배경이다. 지난달 CCL 평균 수출단가는 3만998달러로 1년 전보다 65.2% 급등했다.

CCL 글로벌 제조 공급망에 속한 기업은 실적과 주가도 고공행진하고 있다. 업계에선 엔비디아 GPU에 들어가는 PCB 등이 CCL 단가 인상을 주도한 것으로 본다. 블랙웰에 CCL을 단독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두산 주가는 2024년 4월 말 15만2300원에서 지난달 말 159만6000원으로 2년간 10배 이상으로 뛰었다. 같은 기간 삼성전기는 5.3배, 대덕전자는 4.8배 상승했다.

◇中에 눈 돌려도 “물량 없다”

반면 첨단산업에서 소외된 기업은 CCL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는 위기에 내몰렸다. 특히 국내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가 CCL 공급난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업은 CCL 납품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선박 대신 항공으로 제품을 운송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엔 주문 후 한 달 정도만 기다리면 원하는 물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당장 주문을 넣어도 최소 6개월 이상 기다려야 물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급등하는 CCL 가격도 큰 부담이다. 환율과 유가까지 오르며 제품값뿐 아니라 운송비도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CCL 공급 일정이 불확실해지면서 당초 계획한 PCB 납품 일정을 맞추지 못할까 봐 우려하는 기업도 많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존 거래처뿐 아니라 중국 공급처까지 확보했지만 최근 잇달아 납기 지연 통보를 받았다”며 “뾰족한 대책이 없어 막막하다”고 했다.

CCL(동박적층판)

절연판 위에 얇은 구리판(동박)을 입힌 판. 인쇄회로기판(PCB)의 핵심 소재다

이광식/원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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